교양· 상식. 심리

우리를 구원할 사랑과 정치

송담(松潭) 2011. 12. 26. 10:59

 

 

우리를 구원할 사랑과 정치

 

 

 

 2011년 우리 사회를 돌아볼 때 먼저 떠오르는 말은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티핑 포인트란 모든 게 한꺼번에 갑자기 변화하는 극적 순간을 말한다. 당연했던 게 부자연스러운 게 되고 낯선 게 외려 익숙해지는 지점, 그 티핑 포인트를 우리 사회는 막 지나고 있다.

 

 희망버스 행진, 안철수 현상, 나꼼수 돌풍은 구체적 증거다. 이 세 현상엔 노동, 정당, 공론장의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우리 사회 모순의 핵심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불신에 짜증과 분노가 더해지는 정당정치, 권력 비판이란 본연의 과제를 망각한 공론장이 현재의 자화상이라면, 달리는 희망버스, 아름다운 양보, 통쾌한 말의 잔치는 미래의 풍경이다.

 

 티핑 포인트에 담긴 경영학적 함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인문학적 개념인 국면사’(history of conjuncture)란 말을 써도 좋다. 국면사란 상이한 사건들을 포괄하는 이른바 시대정신의 역사다. 해방 이후 나라 만들기의 양축을 이룬 산업화 25년과 민주화 25년을 넘어 우리 사회는 새로운 국면의 문턱에 서 있다.

 

 문제는 이 국면의 불확실성에 있다. 보라. 세계 최저를 다투는 출산율, 명문대 입학만을 향해 달리는 초··12년의 기나긴 레이스, 천문학적 등록금과 50%를 밑도는 고용률이 젊은 세대의 생애사를 이룬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것도 우울함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지는 못한다. 이직의 불안, 퇴출의 공포, 그리고 아무런 대책 없는 노후를 주조하는 기본 코드는 불안과 좌절과 분노다. 대체 언제부터 시민 다수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듯 쓰레기가 되는 삶을 느끼게 된 걸까. 우리 삶을 구원할 희망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다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정치의 중심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한 국가의 기본 구조가 경제와 사회로 이뤄져 있다면, 그것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은 게 바로 정치다. 그래서 자원과 가치의 합리적 배분이 정치의 기본 과제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우리 현실이다. 사회와 문화는 티핑 포인트를 지나고 있는데 정치는 여전히 철지난 과거의 시간에 안주해 있다.

 

 내게 지난 한 해 가장 인상적인 정치적 사건은 96일 안철수 교수가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기자회견과 103일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야권후보 단일화 경선 과정이다. 안 교수의 아름다운 양보는 차가운 권력을 온기 있는 권력으로, 젊은 유권자들의 인증샷 놀이는 근엄한 정치행사를 신나는 축제마당으로 바꿨다. 낡음과 새로움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티핑 포인트의 순간들이다.

 

 시민정치의 이러한 부상에 긍정적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최장집 교수가 강조하듯 정당은 여전히 중요하다. 시민정치에 담긴 포퓰리즘 성향이 소망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유권자의 다수를 이루는 2040세대가 정치 리더보다는 삶의 멘토에 더 친근감을 느끼는 현실이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에겐 낯설고 때론 불편할 수도 있다. 거의 모든 사안마다 쟁투적 구도를 이루는 상황에서 선뜻 어느 하나를 정치적으로 지혜롭게 선택하기도 어렵다.

 

 시민정치의 등장에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정치 지체현상이다. 시민들은 이미 저 멀리 앞서 있는데 좌우를 막론하고 정당들은 태평양에 외롭게 떠 있는 갈라파고스 군도와도 같다. 쇄신과 통합에 앞서 요구되는 것은 정직한 자기 성찰이다. 핵심은 간판 교체가 아니라 보수적 강남당’, 중도진보적 늙은당’, 진보적 무기력당과의 과감한 결별이라는 것을 여의도만 모르고 있다. 시민 다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스타일의 변신이 아니라 진정성의 태도와 콘텐츠의 혁신이다.

 

 이제 한 주만 지나면 두 개의 선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월요일,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 삶에 의미 있는 건 정치와 사랑이라고 말한 게 문득 떠오른다. 오래전 한 시인은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주 먼 훗날 어느 숲 모퉁이에서 / 기억의 숲 속에서 / 문득 나타나 /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 우리를 구원해다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사랑과 정치뿐인가.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2011.12.26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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