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
사회학이 감정을 다루기 시작한 건 1970년대의 일이라고 한다. 이성과 논리만 좇던 사회학이 성냄과 온유함, 부끄러움과 뿌듯함, 사랑과 미움, 두려움과 놀라움, 외로움과 허전함 따위의 감정을 문화나 사회구조의 맥락에서 따져보게 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감정 사회학의 기념비적 연구로 미국 버클리대 교수 앨리 러셀 혹실드가 1983년 펴낸 <통제된 마음(The Managed Heart)>이 꼽힌다. 혹실드는 여객기 승무원들의 웃음과 친절을 분석해 ‘감정노동자(emotional labour)’란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주로 고객을 접하는 서비스업에서 육체·정신 노동 말고도 자신의 느낌을 통제해야 하는 감정 노동(emotion work)이 부가된 노동자를 가리킨다.
감정노동자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는 다소 논란이 있다. 예컨대 배우들은 종종 스스로 감정노동자라고 한다. 각본에 따라 극중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연기야말로 감정 노동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내키지 않는 상대와 입맞춤을 해야 하는 상황에선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배우의 각본은 다채롭다. 서비스업 감정노동자의 각본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고객이 왕’인 문화에서 감정노동자의 각본엔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웃어야 하는 것뿐이다. 고객감동을 위한 감정의 상품화만 강요된 까닭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어제 여성 감정노동자의 근무환경 개선과 직무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인권가이드를 발표했다. 소비자로부터의 인격모독은 감정노동자에게 다반사라고 한다. 어떤 고객은 터무니없이 욕을 해대고, 어떤 텔레마케팅 고객은 전화로 성희롱도 한단다. 그래도 그들은 웃어야 한다. 속으론 피눈물이 나도 말이다. 30대 감정노동자는 “물건을 팔 뿐 내 자신과 감정을 파는 것이 아닌데도 일부 소비자는 노동자들이 감정을 다치는 걸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혹실드는 논문 <사랑과 황금>에서 감정이 과연 황금이나 상아처럼 누군가에서 빼앗을 수 있는 자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비유를 통해 가난한 노동자의 감정마저 착취되고 소비되는 현대의 삶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 것이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감정노동자들 앞에서 우리는 혹여 스스로 왕을 자처하지나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유병선 / 논설위원
(2011.11.30 경향신문)
<참고>
감정노동이란?
타인의 감정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희생시키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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