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일을 통해서 쾌락을 절제할 수 있다
가령 당신이 오늘 저녁 멋있게 차려입고 차를 몰아 홍대 앞에 있는 클럽으로 유흥을 즐기러 간다고 가정하지요. 그런데 찻길 옆에 난 조그만 연못에 어린아이 하나가 빠져 허우적 거립니다. 누군가가 당장 구하지 않으면 죽고 말 처지이지요.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당신이 클럽으로 차를 모는 대신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일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아마 옷과 구두를 망치고 유흥을 포기해야 했겠지만 그것은 그리 큰 희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아이의 생명을 구하는 커다란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럼으로써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내가 하려는 말은, 소비물질주의가 주는 쾌락을 포기하는 일이 우리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거나 금욕주의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쾌락보다 더 나은 행복을 주는 선택이 있다는 거지요. 우리는 쾌락을 절제하는 금욕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일을 통해서 쾌락을 절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은 일찍이 쾌락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가 고안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알다시피 에피쿠로스는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 제논과 동시대인이자 위대한 경쟁자였는데, 매사에 그랬듯 쾌락을 절제하는 방법에서도 두 사람의 입장은 전혀 달랐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명비평가 루드비히 마르쿠제는 <행복론>에서 그 오묘한 차이를 매우 적절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했지요.
어떤 두 사람이 파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파티에 가면 매력적인 대화도 있고 고급 술도 있지요. 두 사람은 두 가지 모두에 흥미가 있었지만 한 사람은 종교를 통해 음주는 최악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고 대화만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것 보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았지요. 마르쿠제는 금욕을 하느라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스토아주의자이고, 더 큰 쾌락을 위해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했습니다.
한편, 우리가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든지,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싶다든지, 심지어는 애인을 여럿 두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대개 정신적 억압이나 불안 때문에 자기의 가치를 자신에게 증명하고 타인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그런 노력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일시적 쾌락은 느껴도 결코 지속적 만족에는 이르지 못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쾌락을 쫒고 쾌락을 쫒기 때문에 더욱 불안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듭니다.
이처럼 쾌락에 대한 추구는 마치 중독과 같아서 한번 들어서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데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브래들리는 그의 저서 《윤리적 학습》에서 “쾌락이 머무는 동안에는 더 큰 쾌락을 원하기 때문에 만족을 못하고,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항상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라고 설파했지요. 그리고 이 같은 “쾌락주의의 역설” 때문에 “쾌락은 망해가는 연속이다”라고 잘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용규 /‘철학 카페에서 시읽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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