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족

그런 사람, 단 한 명이라도 만났다면

송담(松潭) 2011. 11. 11. 15:27

 

그런 사람, 단 한 명이라도 만났다면

 

 

 

길면 10개월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햇살이 따스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오후. 건너편 공원에서 엄마들이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 잔디밭에는 소풍을 나온 유치원생들. 누군가가 놓친 풍선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세상은 이렇게 여전히 아름다운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이야기를 듣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각오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야. 주치의의 설명을 듣는 순간, 각오 같은 것은 물에 풀어진 휴지만큼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그녀는 오열했다.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 너도 죽을 병 걸렸어?”

위로하러 와준 친구에게 차갑게 쏘아대기도 했다.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위선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자는 혼자가 된 뒤의 평균 수명이 17년인 데 비해 남자의 경우는 2년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아직 서른다섯밖에 안 된 미덥지 못한 남편,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 빨래는? 밥은? 그녀는 그런 남편을 두고 먼저 가야 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

나 죽으면 좋은 여자 빨리 만나서 재혼해.”

남편이 펄펄 뛰었다.

 

 동갑내기 남편과 징그럽게 많이 싸웠다. 사귈 때는 두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고, 결혼도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도 다투는 바람에 친구들의 중재가 아니었더라면 신혼여행도 못 갈 뻔했다. 신혼여행지에선 남편이 바닥에서 잤다. 친구들 부부끼리 여행을 갔다가 화가 나서 남편을 버려둔 채 자동차를 몰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 정도는 싸운 것도 아니었다.

 

 스타 블로거 시절, 동구권 배낭여행을 갔다가 다툼의 최고 경지를 경험했다. 피곤한 가운데 신경을 긁어대다가 대판 싸우고 집에 돌아가면 바로 도장을 찍자는 기세로 각자의 경로를 잡아 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틀 만에 이스탄불에서 소매치기를 당해 주머니의 잔돈을 빼고 몽땅 잃어버렸다. 남편 휴대폰으로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역 앞에서 두 끼를 쫄쫄 굶으며 기다렸다. 밤이 이슥해질 무렵 도착한 남편을 발견했을 때, 단숨에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지만 마음과는 달리 화부터 버럭 내고 말았다.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자존심 때문에. 그러고는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옛날 일들을 떠올리니까 웃음이 나왔다. 두 번 다시 상종을 안 할 것처럼 지독하게 싸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나고 보니, 그런 다툼이나 고생이 즐거운 추억이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악에 받쳐 남편에게 퍼부어댔는지 한심스러웠다.

 

 남편은 그녀에게 집착하거나 그녀를 외로움의 도피처로 삼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표현은 부족했는지 몰라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자기 입맛에 맞춰 아내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싸움의 승자는 항상 그녀였다.

 

 그녀는 이제 알 것도 같았다. 자기의 고집만으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절반은 남편이 져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편은 똑똑함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나 보다. 공감할 줄 아는 능력. 세상 어디서 이렇게 그녀를 잘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남편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그녀 평생의 지기였다. 그게 어른의 사랑 방식이었다. 이해해주고 져주고 기다려주는.

 

 남편이 군에서 제대하던 날이 기억났다. 그녀는 강원도로 마중을 나갔다. 엄청나게 추운 날이었다. 특히 전방은 영하 20도에 가까운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춥지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과 이제부터는 원할 때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만나면 금방 싸우는 통에 친구들이 붙인 별명이 ‘30분 커플이었지만.

 

 그가 예비군 모자를 쓰고 부대 정문에서 뛰어나왔다. 군복 차림이 심하게 추워 보였다. 그녀는 자기 목도리를 풀어 그에게 둘러주었다. 배가 고팠다. 마침 호떡을 파는 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사주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지갑을 열어보니 공교롭게도 천 원짜리 달랑 한 장뿐이었다. 후임들이 골탕을 먹인 것이다. 둘은 웃으며 사이좋게 호떡을 나눠 먹고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그날 그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호떡 포장마차에서 풀렸는지, 아니면 버스에서 떨어뜨렸는지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때 그 목도리가 생각난 것일까. 그녀는 한동안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앉아 있었다.

남편이 신문 한 뭉치와 과일 몇 개를 들고 병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남편에게 노트북컴퓨터 화면을 보여주면서 부탁했다.

이 털실하고 바늘 좀 사다 줄래? 이 색깔 예쁘지?”

남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리 목도리 만들어보려고 그래. 좀 있으면 많이 추워질 거 아.”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겨울은 이번으로 끝이 날지도 모르지만, 계속 살아갈 남편에겐 다시 겨울이 올 테니까. 내가 없어도 내가 짜준 목도리가, 내가 사랑한 사람의 추위를 알아줄 테니까. 언제까지나.

 

한상복 /‘지금 외롭다면 잘되고 있는 것이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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