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족

달팽이와 토네이도

송담(松潭) 2011. 12. 31. 12:59

 

달팽이와 토네이도



 달팽이를 괴롭힌 적이 있나요? (물론 그래선 안 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과 동그랗게 둘러앉아 동그란 달팽이를 놓고 요리조리 괴롭히며 놀았습니다. 말갛고 하얀 얼굴에 은 모래알 같은 눈, 말랑말랑 부드럽고 가느다란 촉수, 이렇게 어여쁜 달팽이가 목을 내밀 때마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풀잎으로 간질였습니다. 달팽이는 꼼틀꼼틀 껍질 속으로 숨었습니다. (절대 그래선 안 되지만) 우리는 모래를 뿌리거나 나뭇가지로 뒤집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달팽이는 비틀비틀 껍질 속으로 숨었습니다. 달팽이가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숨을 곳을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 부럽고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숨을 곳이 있다는 것은 살아갈 곳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나갈 곳도 있고 뻗어날 곳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숨을 곳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숨을 마음껏 쉴 수 있는 곳이겠지요. 거기에선 마음껏 웃고 마음껏 울 수 있겠지요. 숨을 곳이 있어야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용기와 모험, 승부를 벌인 후 기쁨과 영광만이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피로와 슬픔과 상실감과 고통도 있을 겁니다. 펼쳐내지 못한 감정과 생각, 펼칠 수 없는 의지와 꿈도 있겠지요. 우리에게 숨을 곳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을 다시 펼칠 수 있는 위안과 휴식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어디로 갈까요. 또 다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용기와 꿈을 꿀 수 있을까요.


 달팽이에게 장난꾸러기들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껍질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숨을 곳, 모험을 꿈꾸는 곳, 숨 쉬고 웃고 살아갈 곳, 달팽이 껍질 같은 곳이 있지요. 그곳이 어디이든 그 사람이 누구든 그때가 언제이든 어떻게 생겼든 어떤 모양이든 그것을 저는 ‘가족’이라고 말해봅니다. 그런데 달팽이 껍질을 가만히 들여다 본 적이 있으세요? 저는 달팽이 껍질이 토네이도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요? 크기와 위력으로 봐서 달팽이 껍질이 어떻게 토네이도를 닮았냐고요? 글쎄요. 저는 생각하면 할수록 달팽이 껍질은 토네이도랑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달팽이는 껍질에 숨어 있어 좋을 때도 있지만 숨이 막히고 답답할 때도 있겠지요. 딱딱한 집을 지고 평생을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니 정말 지겨워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을 거예요. 달팽이의 껍질도 가족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가족과의 일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즐거운 일 만큼 화나고 힘들었던 일이 많았어요. 사실 힘든 일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늘 다투고 울고 토라지고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잔소리를 들었지요. 또 누군가는 다치고 아프고 문제를 일으키고 고민해야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늘 고민해야만 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 가족의 일들을 단 하나의 물건이나 현상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토네이도가 아닐까요.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검은 회오리, 토네이도.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를 뽑고 지붕을 날려버리고 자동차를 뒤집는 토네이도. 그 안에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 집어삼켜 감아올렸다 다시 내팽개치는 토네이도. 토네이도의 자리는 늘 폐허입니다. 달팽이 껍질 같은 가족, 그 가족은 토네이도이기도 했습니다. 가족의 자리는 폐허였습니다.


 하지만 참 이상하지요?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모여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기다립니다. 토네이도가 또 올지 모르는데 또 그곳에 집을 짓고 둥글게 모여 마을을 만듭니다. 가족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저에게 고통스럽고 슬픈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는 가족에게 돌아갑니다.(그곳이 어디든, 그 사람이 누구든, 제가 돌아간 그곳(사람)을 가족이라고 말해 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을 곳은 패배하여 도망간 곳이 아닙니다. 숨을 곳은 꿈과 용기를 자라게 하는 곳입니다. 숨을 곳이 있다는 것은 기쁨과 사랑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숨을 곳이 있다는 것은 내가 다시 태어나고 다시 새롭게 살아간다는 뜻일 겁니다. 가족이라 부른 그것, 달팽이 껍질이자 토네이도인 그것, 가족.


김경후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