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평소 일찍 자고(밤 11시경) 일찍 일어나는(새벽 5시 반경) 아침형인지라 오늘도 새벽, 탐진강변을 걸었다. 일교차가 심하여 새벽길은 제법 쌀쌀했고 여명의 탐진강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정지된 듯 고요한 물가에 이따금 군데군데 동그라미를 그린 물결은 물고기들이 지상의 공기를 맛보는 한순간의 흔적이다. 강가에 수초와 넓게 펼쳐진 고수부지의 녹색 잔디는 서서히 여린 황색을 섞으면서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물안개를 피어올린 새벽강가에 황새같은(새의 이름을 몰라서...) 새들이 여기저기 멋진 포즈로 서 있다. 강의 도처에 생명이 숨쉬고 있음이 감지되고 상쾌한 바람은 온 몸을 맑은 정기로 감싼다. 이렇게 신선한 자연과 함께 새벽을 열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에 대한 축복임이 분명하다.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해마다 맞는 가을엔 낭만적 사랑을 꿈꿨던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냉철한 이성이 늘 계절이 자극하는 욕망을 억압하였고, 존재의 버거움도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러운 푸념이라 생각되었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체념이 나이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그 무수한 번민, 그 유아적 미숙함이 안개 걷이듯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스스로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도덕감이 승리의 길로 가는 길목이다. 이제 ‘비천한 자아’가 득세하지 않고 ‘고상한 자아’가 승기(勝氣)를 잡아가는 시점에 다다른 것일까. 지금까지 계절을 접하는 태도에 변화가 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과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새롭게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약 1,000년 전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1017~1073)는 자기 집 창가 앞뜰에 잡초를 뽑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고 한다. 지저분하게 우거진 잡초를 왜 뽑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는 “내 뜻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잔혹하게 뽑힌 잡초의 고통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풀 한포기의 잡초도 한 몸으로 느끼는 자연에 대한 깊은 감수성으로 모든 생명체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려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같은 시대를 함께 했던 정호(1032~1085)라는 유학자는 조용한 봄날 정원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여린 병아리를 보며 병아리가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 고통받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약한 존재임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병아리를 통해서 그는 취약한 삶, 돌보아야할 삶, 고통을 함께 해야 할 타자의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 좋은 계절에 낭만이라는 엉뚱하고 부질없는 꿈을 반복하는 것 보다 풀 한 포기에도 사랑을 심을 수 있는 자연에 대한 깊은 감수성과 지금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랑하는 나의 형제자매들과 가까운 지인, 그리고 이웃들, 이러한 타자에 대한 애정어린 감수성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공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가을! 황홀하게 물들어가는 단풍의 빛을 향해 외쳤던 낭만스런 탄성을 이제는 자연과 타자에 대한 깊은 애정과 감수성으로 바꿔보자.
< 2011. 10. 7 >
사진출처 : 유형민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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