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미친 짓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나아가 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싶어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 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고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불행이도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때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고독의 실체이다. 그래서 홀로 술을 마신다든가, 아니면 자신의 방에서 외롭게 칩거하면서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고독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손을 내밀 때이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숙명이다.
헤겔(1770~1831)은 “아내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리고 남편도 자식을 사랑한다. 그런데 자식은 바로 아내와 남편이 객관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사랑하지 않았어도 두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다. 물론 육체적 관계를 맺었던 그 순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을 가능성은 크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식을 낳은 뒤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이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자식은 사랑의 객관적 모습이라기보다,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된 두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두는 족쇄로서 기능하게 된다.
헤겔을 읽다보면 <선녀와 나무꾼>이란 전래 동화가 떠오른다. 아이를 셋이나 가졌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파국을 맞는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나무꾼이 선녀의 자유를 박탈한 채로 결혼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날개옷을 빼앗아 선녀의 자유를 박탈했고, 두 번째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다시 한 번 선녀의 자유를 박탈한다. 그렇지만, 날개옷을 되찾은, 다시 말해 자유를 되찾은 선녀는 바로 나무꾼을 떠나버린다. 이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헤겔보다 더 지혜로왔다고 할 수 있다. 헤겔에게는 미안하지만, 결혼과 자식은 두 사람의 사랑을 보장해줄 수 없다. 헤겔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변모하는 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우리에게는 결단의 순간이 왔다. 사랑이란 불안한 열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이란 평안한 일상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사르트르(1905~1980)와 보부아르(1908~1986)가 걸었던 제3의 길도 존재한다. 결혼이나 가족제도가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여 사랑의 열정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은 평생 동안 계약결혼이란 삶의 형식을 관철시켰다. 어쨌든 잊지 말아야할 것이 하나 있다. 결혼을 했든 아이를 낳았든 간에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만큼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신주 / ‘철학이 필요한 시간’ 중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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