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이웃의 체온

송담(松潭) 2011. 4. 29. 17:39

 

 

이웃의 체온

 

 

 

 수인들은 늘 벽을 만납니다.

 통근길의 시민이‘stop'을 만나듯, 사슴이 엽사를 만나듯, 수인들은 징역의 도처에서 늘 벽을 만나고 있습니다. 가련한 자유의 시간인 꿈속에서마저 벽을 만나고 마는 것입니다. 무수한 벽과 벽 사이, 운신도 어려운 각진 공간에서 우리는 부단히 사고의 벽을 헐고자 합니다. 생각의 지붕을 벗고자 합니다. 흉회쇄락(胸懷灑落), 광풍제월(光風霽月), 그리하여 이윽고 광야의 목소리, 달처럼 둥근 마음을 기르고 싶은 것입니다.

 

 아버님 서한에 육년래(六年來)의 혹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추위를 실감치 않았음을 웬일일까. 심동(深冬)의 빙한(氷寒), 온기 한 점 없는 냉방에서 우리를 덮어준 것은 동료들의 체온이었습니다. 추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체온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냉방이 가르치는 의 의미를, 겨울이 가르치는 이웃의 체온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생략).........

 

 

 

 

세월의 아픈 채찍

 

 

 기상시간 전에 옆사람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뽑아 벽 기대어 앉으면 싸늘한 벽의 냉기가 나를 깨우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이때가 하루의 가장 맑은 시간입니다.

 

 겪은 일, 읽은 글, 만난 인정, 들은 사정.... 밤의 긴 터널 속에서 여과된 어제의 역사들이 내 생각의 서가(書架)에 가지런히 정돈되는 시간입니다. 금년도 며칠 남지 안은 오늘 새벽은 눈 뒤끝의 매운 바람이, 세월의 아픈 채찍이, 불혹의 나이가 준엄한 음성으로 나의 현재를 묻습니다.

 

 손가락을 베이면 그 상처의 통증으로 하여 다친 손가락이 각성되고 보호된다는 그 아픔의 참뜻을 모르지 않으면서....

..........(생략).........

 

 

 

 

황소

 

 

 더운 코를 불면서 부지런히 걸어오는 황소가 우리에게 맨 먼저 안겨준 감동은 한마디로 우람한 역동이었습니다. 꿈틀거리는 힘살과 묵중한 발걸음이 만드는 원시적 생명력은 분명 타이탄이나 8톤 덤프나 위대한 탄생에는 없는 위대함이었습니다. 야윈 마음에는 황소 한 마리의 활기를 보듬기에 버거워 가슴 벅찹니다.

 

 그러나 황소가 일단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자 이제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우람한 역동 뒤에 어디메에 그런 엄청난 한()이 숨어 있었던가. 물기어린 눈빛, 긁어서 더욱 처연한 두 개의 뿔은, 먼저의 우렁차고 건강한 감동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잔잔한 슬픔의 앙금을 채워놓습니다.

..........(생략).........

 

 

 

 

아내

 

 

 함께 징역 사는 사람들 중에는 그 처가 고무신 거꾸로 신고가버린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가 하면 상당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짧지 않은 연월을 옥바라지 해가며 기다리는 처도 없지 않습니다. 이 경우 떠나가버린 처를 악처라 하고 기다리는 처를 열녀(?)라 하여 OX 문제의 해답을 적듯 쉽게 단정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곳 벽촌(碧村) 사람들은 기다리는 처를 칭찬하기는 해도 떠나가는 처를 욕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떠남과 기다림이 결국은 당자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탓하기에 앞서 그런 마음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가(媤家)에 남아 있는 사람, 친정에 돌아가 얹혀사는 사람, 의지가지 없어 술집에라도 나가 벌어야 하는 사람..... 그 처지의 딱함도 한결같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마음마저 부지할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처지에 놓인 사람도 허다합니다. 그 처지가 먼저이고 그 마음이 나중이고 보면 마음은 크게는 그 처지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징역간 남편에 대한 신뢰와 향념(向念)의 정도에도 그 마음이 좌우됨을 봅니다. 이 신뢰와 향념은 비록 죄지은 사람이기는 하나 그 사람됨에 대한 아내 나름의 평가이며, 삶을, 더욱이 힘든 삶을 마주 들어봄으로써만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적실한 이해이며 인간학입니다.

 

 떠나가는 처를 쉬이 탓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처럼 그 아내의 처지와 그 남편의 사람됨을 빼고 나면 그 아내가 책임져야 할 마음이란 기실 얼마 되지 않는 한 줌의 인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정이란 것도 사람의 도리이고 보면 함부러 없이 보아넘길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기에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바린 처를 일단은 자책과 함께 이해는 하면서도 그 매정함을 삭이지 못해 오래오래 서운해 하는가 봅니다.

..........(생략).........

 

신영복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 사색중에서

'상처의 치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피의 선택  (0) 2011.08.22
절망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다   (0) 2011.08.20
일본에의 예의   (0) 2011.03.17
불안 극복,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0) 2011.02.11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  (0) 2011.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