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無名의 아름다움

송담(松潭) 2009. 12. 3. 10:52

 

無名의 아름다움

 

 

 보살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여름 초록이 엊그제인 듯 짙푸르더니 어느새 만산홍엽도 다 지고 말았습니다. 계절은 또 어김없이 지나가는군요. 그림자 길게 이끌고,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문안 드려야 했지만 오늘에야 인사를 올리게 되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보살님께서 자신의 신상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시니 제 마음을 전할 도리가 달리 없었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자취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밝혀지기를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전갈만 접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받는 일조차 사양하시는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되면서, 오히려 이름 석 자를 분별하는 일이 속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언제였던가요. 보살님께서 문득 제 집무실로 찾아오신 때가 지난 2월 2일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출근하자마자 간부들과 회의를 하는 중, 전혀 일면식도 없고 사전 연락도 없이 나타나셔서 별다른 말씀도 없이, 그저 대학 발전에 도움이 될까 해서… 하시면서 주섬주섬 내민 봉투를 얼떨결에 받아 쥐었지요.

 

 단아한 중년의 풍모를 기억합니다. 서리를 맞고 피는 국화처럼, 삶의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원숙한 지혜로움이 그 풍모 속에 있었습니다. 담백하게 몇 마디 남기시고 자신에 대해 여쭈는 일조차 말리시곤 총총히 나서시는 뒷모습을 배웅만 하고 말았습니다. 보살님께서는 배웅하러 나서는 제 걸음마저 손사래 치며 만류하셨지요. 가신 뒤에야 조심스레 열어본 봉투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3억원의 정재(淨財)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정재란, 말 그대로 깨끗한 기부금 아니겠습니까. 참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말로만 들어왔던 불가의 가르침으로,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지워버리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진정한 뜻과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비는 무엇을 바라 내리지 않습니다. 찬란한 햇빛 또한 아무런 대가 없이도 만물을 따뜻하게 해주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경전에서 마주치는 구절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생생하게 경험하다 보니 그 환한 기쁨의 충격이 꽤나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징소리의 울렁이는 뒤끝처럼 말이지요.

 

 

 감사의 마음에 어찌 위아래가 있으며 크고 작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은근하고 깊은 향기가 조금씩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공익을 위한 명분이나 구구절절한 사연도 없이 영수증마저 마다하신 분을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보살님, 그날 아침 향기롭고 눈부신 무량공덕에 저는 한참이나 망연자실했습니다.

 

 보살님, 감사합니다.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 잘 계시겠지요? 황망 중에 만나 뵌 지 어언 열 달이 되었군요. 그래도 보살님의 아름다운 손사래는 문득 눈앞에 어른거리고, 마음의 향기는 시간을 깊숙하게 가로질러 오늘 아침 코끝에 아련합니다. 비록 이름도 모르지만 보살님 생각할수록 기쁨이 커지기만 하니 제가 참 복 많은 사람입니다. 3억원의 정재가 어찌 작은 돈이겠습니까? 그러나 보살님의 깨끗한 마음은 그보다 더욱 커서 도무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살님, 감사합니다.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베풀되 바라지 않으며, 스스로를 낮추면서 남을 높이는 그 깨끗한 마음의 향기가 더욱 그리운 아침입니다.

 

오영교 / 동국대 총장

(2009.12.3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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