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베짱이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자 베짱이는 먹을 것을 찾아 집을 나섭니다. 여름 내내 노래만 부르고 놀았던 탓에 비축해둔 양식이 한 톨도 없었지요. 하는 수 없이 베짱이는 구걸하기 위해서 개미집 문을 두드립니다. 한 번 두 번 점점 세게 두르려 봤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베짱이는 문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여름내 벌어들인 양식이 곡간에 그득히 쌓여 있는데 개미들은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 겁니다. 여름내 너무 일만 한 탓에 모두 다 쓰러져 과로사로 숨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베짱이는 신이 나서 배부르게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겨울을 편안히 났습니다.
이 새로운 이솝 우화는 일중독에 걸린 일본인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일만 하고 쓰지는 않는 일본인들은 저축률 15%에 개인 금융자산 1천 3백조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세계 기록을 세웠지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불황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개인 소비가 국내총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자의 천국답게 미국 버전의 베짱이 이야기는 일본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미국 우화 베짱이 역시 개미집 문을 두드리는 대목까지는 다름이 없지만 그 다음이 아주 놀랍지요.
베짱이는 개미집을 열심히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욕만 먹고 쫓겨났지요. 춥고 배고프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베짱이는 죽기 전에 즐거웠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기력을 다해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연주는 유난히 슬프고 감동적이었죠.
여름내 일만 하느라 음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내던 개미들은 비로소 베짱이의 음악에 매료되어 모여들었습니다. 베짱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지요. 재빨리 개미의 무리를 향해 “Ticket please!(입장권을 내라)”고 소리쳤습니다. 결국 베짱이는 겨울마다 리사이틀을 열어 마이클 잭슨 같은 큰 부호가 되었습니다.
옛 소련의 우화는 어떨까요? 위의 두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베짱이도 개미도 모두 굶어 죽는다는 점입니다. 구 소련의 붕괴를 패러디한 이솝 우화의 새 버전은 이렇게 끝납니다.
개미들은 밖에서 떨고 있는 베짱이를 보자 위대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이념을 전 세계에 고하기 위하여 플래카드를 걸고 환영합니다. “베짱이 동무, 이제 우리 집단 노동장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먹는 동무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고는 개미들은 베짱이를 당원으로 받아들여 성대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덩치 큰 베짱이가 객식구까지 데려오는 바람에 며칠 안가 비축한 식량이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겨울을 나기도 전에 그들은 모두 굶어죽고 말았지요.
파이가 없는 분배는 결국 가난과 죽음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국판 뉴 버전 ‘개미와 베짱이’는 어떻게 될까? 그것이 궁금하지요?
앞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만 큰 틀에서 보면 같은 패러다임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를 일하는 것work, 노는 것play, 생산자와 소비자의 흑백 구도로 나누었다는 점에서는 각 나라의 이야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프랑스 작가 라풍텐의 우화에서는 비록 구 소련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개미와 베짱이의 두 존재가 서로 결합하는 상태까지 이릅니다. “당신이 여름내 노래를 들려줘서 우리는 고단함을 모르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자, 여기에 당신 몫이 있습니다.”라며 음식을 나눠주는, 베짱이와 공생하는 개미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라풍텐의 우화라고 해도 여전히 개미는 일하는 자, 베짱이는 노는 자로 양분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생산과 소비, 노동과 놀이의 두 가치가 대립이 아닌 상호작용으로 풀이돼 잇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발상을 학구적으로 나타낸 것이 이른바 ‘문화 경제학’이니 ‘문화 자본주의’니 하는 말들입니다. 베짱이의 놀이와 노래 자체가 개미의 영역인 경제활동에 편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 선진국들의 가계비 통계를 보면 불과 몇 년 사이에 교육과 오락 등의 문화 활동에 지출되는 비용이 식료와 생필품 구입비용을 웃돌고 있으며, 그 성장률도 수직상승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베짱이의 시대가 오히려 개미를 압도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이 종언하고 그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진정한 융합문화가 생겨납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인의 ‘노동=놀이’관을 한마디로 나타낸 “뽕도 따고, 님도 보고”라는 속담입니다. 혹은 “쉬엄쉬엄 일하다”처럼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같은 리듬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상태이지요. 이러한 노동=놀이를 이솝 우화에 대입하면 그 우화 자체가 해체되고 개미와 베짱이는 하나로 매시 업이 됩니다.
이어령 / ‘젊음의 탄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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