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개밥바라기별

송담(松潭) 2008. 11. 2. 20:32

 

27033

 

개밥바라기별




 1.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버스를 탔을 때에는 눈송이가 커지면서 함박눈이 되었다. 차들은 네거리가 나올 때마다 밀려서 서로 엉키고 신호는 있으나마나였다. 나는 연신 손목시계를 살피다가 차라리 걷기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도와 인도가 벌써 분간할 수 없이 눈에 덮였고 내가 쓰고 있던 군모의 챙 위에도 눈이 쌓였다. 세 블록을 더 지나가야 공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고 가로수를 부등켜 안았다가 마주 오는 행인들과 부딪치키도 하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은 더욱 미끄러웠다.


 내가 공원 입구에 이르렀을 때 시간은 이미 삼십 분이나 지난 뒤였다. 사철나무는 흰 솜사탕처럼 뒤집어쓰고 있었고 은행나무며 플라타너스 가지에는 눈꽃이 하얗게 피어나 있다. 벤치도 하얀 눈에 덮여서 연필로 그린 것 같은 선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잠깐 멈춰서서 저쪽 먼 광장과 어린아이 놀이터까지 내다보았다. 외투 차림의 사람들이 몇몇 보였지만 그녀는 없었다. 곧장 어린이 놀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눈발이 끊임없이 날리는데 미끄럼틀이며 사다리, 그네와 시소가 아이들 없는 공간에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나는 입 속으로 뭔가를 투덜거렸을 것이다. 그녀가 일찍부터 와서 나를 기다리다가 지금의 나처럼 이 자리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천천히 공원을 빠져나가는 게 보일 것 만 같았다. 그때 나는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고 분명한 느낌이었는데 실 같은 것이 툭, 하고 끊어져가는 듯했다.



2.

 또 어떤 날에는 어려서 멱감으러 여의도의 빈 풀밭에 나가 거닐었지요. 강아지풀, 부들, 갈대, 나리꽃, 제비꽃, 자운영, 얼레지 같은 풀꽃들이며, 논두렁 밭두렁의 메꽃 무리와. 풀숲에 기적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주황색 원추리 한 송이, 그리고 작은 시냇물 속의 자갈 사이로 헤집고 다니는 생생한 송사리 떼를 보고 눈물이 날 뻔했거든요. 눈썹을 건드리는 바람결의 잔잔한 느낌과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행렬, 햇빛이 지상에 내려앉는 여러 가지 색과 밀도며 빛과 그늘, 그러한 시간은 학교에서 오전 오후 수업 여섯 시간을 앉아 있던 때보다 내 삶을 더욱 충족하게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3.

 우리는 사흘 동안 섬진강에서 신나게 놀았다. 멱감고 고기 잡고 몸도 태우고 낮잠도 늘어지게 잤어. 순창 인근의 섬진강 상류는 깊이가 무릎 정도였지만 깊은 곳은 한 길이 넘는 곳도 있었지. 우리 중에 영길이만 투망을 제법 던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여름방학에 시골에 올 때마다 한두 번씩 해본 솜씨에 지나지 않는다나.

 영길이가 몇 번 던지자 나도 눈썰미가 있어서 본 대로 흉내 내어 던졌더니 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나가더군. 그물을 걷어내니 손바닥만한 은어 몇 마리가 녹색의 등과 흰 뱃바닥을 뒤집으며 펄떡이고 있더라. 내 투망 솜씨는 점점 노련해졌지. 얼마 안 가서 양동이에 반이나 차오르도록 은어며 모래무지 따위의 물고기들을 잡았어.

 우리 넷은 부근 밭에 가서 깻잎 풋고추 등속을 따오고 가져온 마늘과 된장 고추장으로 쌈장을 만들어 즉석에서 은어회를 쳐서 먹었지. 비린내는커녕 수박 향내가 난다고들 그러는데 풀냄새 비슷한 싱싱한 냄새가 나기는 하더라.



4.

 철도를 따라가는 해안 국도변을 걸으면서 오른쪽에 흰 파도의 거품이 보이는 바다를 끼고 왼쪽에는 송림이 계속되었다. 키가 껑충하게 자라난 적송 위에 화투장 그림처럼 황새가 앉아 있거나 날아가곤 했다.


 망상 부근의 바닷가 언덕 위에 밭과 논이 있었는데, 소나무 숲에 모여 앉았던 농부 가족들이 우리를 손짓하여 불렀다. 때마침 끼니때였던 모양이다. 조가 많이 섞인 밥에 고사리 취나물 열무김치 된장에 풋고추, 그리고 바닷가라고 비린 것이 빠질 수 없어 반건 노가리조림에 멸치식해와 찐 호박잎까지 있고 반주로 내준 막걸 리가 사이다보다도 시원했다.


 옥계의 아름다운 어촌을 지나다가 물오징어 서너 마리를 얻어 등산용 나이프로 썰어서는 바닷물에 씻어 회로 먹기로 했다. 정동진과 안인진을 잇는 바닷가 길은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서 바위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쉬어가기도 했다. 그 어느 어름에선가 철도와 도로가 나란히 만나고 바로 철길 아래로 파도가 찰싹이는 해변가에 묘지가 있었다. 인호와 나는 묘지로 뛰어 내려가 풀 위에 누워 바람과 파도소리를 듣기도 했다. 나는 무덤 위에 돋은 강아지풀을 꺾어 입에 물고 누워 있었다. 죽어서 이런 데 묻히면 지옥이든 천당이든 다른 데는 가기 싫겠는데?

저 바다는, 철썩인다. 소나무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5.

 저녁 무렵의 신탄진 강변은 언제나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일 끝내고 씻으러 내려가면 어두워지기 시작한 강변의 숲과 거울처럼 맑은 수면 위로 가끔씩 물고기들이 뛰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면 물속에 텀벙대며 들어가기가 아까워서 잠시 서 있곤 했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아저씨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좀 가만있으라고 짜증을 냈다.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운 고즈넉함을 더욱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라, 저놈 나왔네.

아저씨가 중얼거리자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저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6.(작가의 말)


나는 젊은 시절에 방랑을 하면서 저녁 무렵 해가 지자마자 서쪽 하늘에 초승달과 더불어 나타나던 정다운 나의 별을 기억하고 있다. 벌써 경험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땅거미 질 무렵은 세상이 가장 적막하고 고즈넉해지는 순간이다. 새들도 바삐 저녁 숲을 찾아 깃으로 숨어들고 나무들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직전 짧은 정적 속에 가지를 벌리고 조용히 서 있다. 동네 아이들도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밥상머리로 돌아가고 굴뚝에는 잔불연기가 오르는데 창마다 노란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나는 낯선 마을의 고샅길 모퉁이에서 또는 들판의 두렁길 위에 서서 그맘때 나타난 그 별을 올려다보았다.


 육십 년대에 나와 함께 남도를 떠돌던 삼십대의 부랑노동자가 그 별의 이름을 내게 말해주었다. 금성이 새벽에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라 부른다고 한다. 즉 식구들이 저녁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줬으면 하고 바랄 즈음에 서쪽 하늘에 나타난다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나는 개밥바라기별의 이미지가 이 소설을 읽은 여러분의 가슴 위에 물기 어린 채로 달려 있게 되기를 바란다.


황석영 / ‘개밥바라기별’중에서



< 독자 생각 >


참으로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어제 해질 무렵 어둠이 오기 전에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초승달이 떠 있었고 그 옆에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승달과 그 별과 함께 배경을 이룬 구름과 노을이 아름다운 풍경을 채색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나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집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달과 별과 구름과 노을의 풍경을 함께 감상했습니다.  저것은 자연이 그려내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야말로 살아있는 예술품이라는 말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내가 바라보았던 그별이 ‘개밥바라기별’이라니.

그 시간 내가 읽고 있는 책이 ‘개밥바라기별’이었는데 그때는 ‘개밥바라기별’의 뜻을 몰랐고 오늘 책을 마무리하면서 알았습니다.

(책의 끝부분에 언급이 되어)


어제 저녁 나에게 ‘개밥바라기별’을 미리 보도록 인도했던 그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책속에 플라톤의 ‘이데아’라도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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