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으로 남은 묵자 철학
묵자 철학은 중국 고대 철학 가운데 피지배 계층의 편에 가장 가까이 선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억압과 수탈을 일삼은 지배 계층을 향해 똑같이 사랑하라고 외침으로써 정치적 평등을 확보하려 했고, 서로 나눠 갖자고 주장함으로써 경제적 수탈에 대항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는 지배층의 음악, 노래, 춤을 반대했고, 화려한 장례를 반대했습니다. 현실적인 지배를 운명이라고 합리화하는 지배논리에 맞섰고, 강자의 영토 확장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침략전을 막기 위해 직접 무기를 만들고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묵자의 사상은 지배층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통일의 기운이 한곳으로 모이지 않았을 때는 많은 약소국이 묵자의 뛰어난 방어전 기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묵가 집단을 유지시키는 사회적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이 깨져 몇몇 강대국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면서부터 묵가의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왕권이 안정되자 묵자 사상은 완전히 소멸하고 묵가 집단도 없어졌습니다. 다만, 그 뒤로는 협객들의 집단, 즉 의적 같은 비밀 결사들을 통해 명맥을 이어 갔을 뿐입니다.
묵자 사상이 소멸된 원인은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묵자 사상이 상당히 호응을 얻고 있을 때 맹자는 묵자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맹자는 묵자의 겸애가 자기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했습니다. 묵자의 유가 비판에 대한 유가의 대응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묵가와 유가 사이의 이러한 대결 의식은 묵가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는 동안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당시는 정부의 통제 밖에 있는 자유로운 대립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를 이어 중국을 평정한 한나라가 유가 이론을 통치 원리로 받아드리면서 묵자의 철학이 더 지속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묵자에게는 서로 사랑하고 함께 나누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묵자 사상은 2,500여 년 전이라는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혁명적 사상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묵자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집단을 만들었고, 강자에 맞서 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자는 혁명을 꿈꿀 수 없었습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에 혁명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묵자가 피지배 계층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공격 전쟁을 의미하게 되고 공격 전쟁은 겸애에 어긋나는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점이 묵자의 꿈이 이루어질 수 없는 내부 요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묵자 사상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을 보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적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헌신적인 자기희생과 꿋꿋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 내면에는 또 다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기심입니다. 사회주의는 강한 조직력과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지탱되었고, 경험과 실천이 그 사회의 추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직력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이기적인 욕구가 뚫고 나왔을 때 사회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박에 없었습니다.
묵자도 이성에 호소함으로써 묵가 집단을 강철 같은 대오로 이끌어 갔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늘의 뜻이라는 외피도 있었지만, 주된 동력은 이상사회에 대한 갈망과 꿈이었고, 이를 통해 내적 성실성과 아울러 외적인 배척력을 함께 가질 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즉 팽팽한 긴장이 강한 단결력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 전국의 혼란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혼란의 종말은 지배 집단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강화하였습니다. 혁명 이론이 없는 묵자의 철학이 이런 상황에서 더는 지탱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틈을 이기적 욕구가 그대로 놓아둘 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2,500여 년 전 중국의 획기적인 사상은 꿈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김교빈 / ‘동양철학 에세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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