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자연적 불평등과 복권

송담(松潭) 2007. 3. 8. 00:26
 

< 1 >

 

자연적 불평등과 복권



루소(1712~1778 스위스)는 <인간불평등의 기원론>에서 인간의 불평등을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평등으로 나누고 그중 사회적 불평등에 관심을 갖았다. 루소는 사유재산의 평등한 분배와 사회보장을 강조하여 루소의 사상은 지금으로 보면 좌파에 가깝다.


 나는 루소가 강조한 사회적 불평등과 함께 루소가 소홀히 한 자연적 불평등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불평등이 모두 해소된 꿈같은 사회가 왔다고 하자.

그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라고 해도 권익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일은 공적인 정의를 기준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 불평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미팅에 나온 두 여자가 있다. 두 사람은 지식이나 성격, 인격, 재산상태, 사회적 신분 등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같은 남자에게 몹시 호감을 느꼈다. 그 남자와 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한 여자는 선택되고 다른 한 여자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생김새 때문이었다. 이 경우 누구에게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가. 근본 원인은 자연적 불평등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해소할 길이 없다고 봐야 한다. 굳이 얘기한다면 팔자 탓이라고 할까?


 두 남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무지하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대충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무지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보다 대충하는 학생이 공부를 더 잘한다. 왜냐하면 머리가 워낙 좋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도 좋은 머리를 당해낼 수가 없다.


 나도 노래 잘 부르고 싶은데 왜 음치로 태어났을까? 노래방에서 노래 잘 부르면 좋은데 왜 나는 요 모양 요 꼴로 태어났을까? 물론 노래방에서 노래 못 부른다고 사회적 불평등이 생기지는 않지만 억울함은 차곡차곡 쌓인다. 이렇게 자연적 불평등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소리 없는 억울함과 분노를 낳고 있다.


 자연적 불평등이 쌓이면서 조용한 분노가 점차 자라고 이는 다른 형태, 곧 사회적 불만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해소할 수 없는 자연적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사회장치를 요구한다. 복권은 바로 그런 완화책의 하나로 고안됐다.


 대체적으로 복권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사행심을 조장한다거나, 노력하자 않고 횡재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거나 등등. 어쨌든 부정적 평가가 대체적이다. 하지만 복권이 단순히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많이 팔리고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돈 때문에 사람들은 복권을 긁는 것일까?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복권이 자연적 불평등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치유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복권은 전적으로 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지식도, 미모도, 성격도, 재산도 관계가 없다. 오로지 운만 있으면 된다. 여기에 불평등이란 없다. 뭔가 있다고 한다면 운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뿐이다. 그야말로 운이므로 불평등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매주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당첨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지하철 담벼락에 껌처럼 붙어 서서 즉석 복권을 긁을 때의 삼매경, 희망을 잔뜩 안고 복권을 사는 순간에는 어떠한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마치 원초적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아무런 차이도 없기 때문에 불평등도 없는 원초적 상황이 복권을 긁을 때 마음의 풍경이다.


 이런 이유에서 경제적으로 풍요한 유럽에서도 복권의 인기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다. 사회적 불평등을 상당히 해소한 사회라 하더라도 자연적 불평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므로 복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복권이 중독성이 있다고 해도 사회적 해악은 미미하다. 매주 몇 장의 복권을 산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고,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도 거의 없다. 오히려 주택이라든가 문화진흥 등 상당히 거창한 이름의 기금을 조성하는데 도움을 주기까지 한다.


탁석산 / ‘철학 읽어주는 남자’중에서

 

  

복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군요.

 

허나 복권에 당첨되었다하더라도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신체 조건 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통상 복권을 구입하는 의도가 비교적 경제적 약자들이

일확천금을 통한 경제적 신분상승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결국 복권구입은

자연적 불평등 해소가 아닌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위한 것이

아닐런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 2 >

 

사회적 불평등과 스포츠



 스포츠는 사회적 불평등의 완화책 역할을 한다. 스포츠가 현대에 자연적 불평등의 완화책이 될 수 없는 까닭은 스포츠 능력 자체가 지능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불평등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연습해도 100미터를 9초대에 달릴 수 없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130미터짜리 홈런을 칠 수 없다.


 그렇다고 스포츠가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는 규칙에 따라 진행되며, 규칙은 공개돼 있고, 누구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사회에는 법이란 규칙이 있지만 법은 강자의 이익이다. 억울하지만 돈이 없으면 재판에서 지기 일쑤다. 또한 법이 존재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구체적 내용을 알지 못한다. 축구 규칙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스포츠 규칙은 뒤에서 도사린 음모 같은 것이 없다. 즉 규칙의 저의를 따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포츠가 사람을 달래주는 것은 게임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다. 사회는 규칙이 존재하지만 규칙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소리 없는 분노와 하소연할 길 없는 억울함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그래도 공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게임을 보고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육상과 축구 같은 종목이 인기가 있고, 승마나 요트 같은 종목이 인기가 덜 한지를 알 수 있다.


 육상이나 축구를 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지만 승마나 요트는 일단 돈이 들어야 할 수 있는 스포츠다. 벌써 사회적 불평등이 상당히 개입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점이 싫은 것이다. 스포츠에서 조차 그런 것을 맛보아야 하겠는가!

누구나 할 수 있고 돈이 없어도 할 수 있고 규칙이 단순한 스포츠가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탁석산 / ‘철학 읽어주는 남자’중에서

 

 

 

 

 


스포츠가 종류에 따라서는

어떤 종목은 적은 비용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으므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도구가  된다는 분석은 

저가 몰랐던 사실입니다.

 

물론 승마와 같은 비용이 많이 드는 스포츠는

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워

본인이 직접 승마를 하면서 즐기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가 제기 되지만

 

축구경기와 같이 경마장에 가서 경마 경기를 관람할 경우는

경마도 축구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불평등 해소의 도구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포츠는 어떤 종목이든지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책이 되기 어렵다고 보며 

그것은 항구적일 수 없고 일시적인 돌파구를 찾는 것이거나 

자기위안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경제적 약자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운동장에서의 경기관람이 어떻게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일시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문제의 근본을 찾아 원인을 제거하는 병인(病因)요법이 아니라,

상처의 겉만 치료하는 대증(對症)요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 분석과 철학의 문외한인 독자의 생각입니다.-

'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이지 않는 손‘만 보이나  (0) 2007.03.25
연암 박지원의 우정론  (0) 2007.03.12
열 개의 방에서 잠자기  (0) 2007.03.06
날마다 새로움으로 가득한 삶을 위하여  (0) 2007.02.13
선물의 논리  (0) 2007.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