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사랑은 ‘하나’인가? ‘둘’인가?

송담(松潭) 2007. 2. 11. 09:39

 

 

사랑은 ‘하나’인가?  ‘둘’인가?

 

 



하나’를 지향했던 헤겔


 헤겔은 말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의 통일이자, 그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사랑 속에서 나는 타자와 ‘하나’라는 전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결국 헤겔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에 대한 경험이자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표현인가요? 쉽게 풀어보도록 하죠.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그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마치 나의 일부분인 것처럼, 그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런 ‘하나’라는 느낌에 입각해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레나데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당신은 나의 영혼이야.”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야.” 그런데 문제는 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느낀 ‘하나’의 경험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헤겔의 말처럼 사랑의 감정이 실체적 통일이라고는 하지만, 이 감정에는 아직 어떤 객관성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 점에서 헤겔은 결국 사랑이 유아론적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나와 타자 사이에 자녀를 도입하고, 가족이라는 일종의 변증법적 종합의 형태를 제안하게 됩니다. 헤겔의 제안은 사실 지금도 통용되는 방식입니다.

친정어머니는 결혼한 딸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계속 아이를 낳지 않으면 네 남편은 언젠가 바람을 피우게 될 수도 있어.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은 부부가 이혼하기 쉬운 법이야. 빨리 아이를 낳아. 그래야 부부간의 사랑을 오래 유지할 수 있어.”

 

 분명 결혼한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2세를 낳을 수 있습니다. 헤겔은 이 2세를 바로 사랑의 ‘객관성=대상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녀(2세)를 나와 타자 사이의 사랑이 육화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에게 있어 자식, 즉 2세는 사랑의 현실화이자 동시에 그것을 매개하는 원리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남자-여자-자식’이라는 변증법적 삼각형,

즉 ‘가족’구조를 통해서 헤겔은 ‘사랑’의 유아론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탈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헤겔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았고 또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가 필연적으로 그 남편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헤겔의 논리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도입함으로써 부모 쌍방 간의 사랑을 교모하게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두 남녀 사이의 사랑을 유아론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해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헤겔의 기대와는 달리 남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족 자체가 사랑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헤겔의 사랑이 함축했던 유아론은 ‘가족’을 통해서도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그의 사랑, 즉 ‘하나’로의 열망과 열정은 쉽게 성공할 수 없는 시도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둘’로 생각하는 바디우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라는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 사랑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게 됩니다.

여기에 현대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Alain Badiou(1937~)의 철학적 통찰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라는 헤겔적 이념을 거부하면서, 사랑을 ‘둘’로 사유하려고 했던 중요한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디우는 ‘사랑’을 ‘둘 the Two'로 정의 내립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남녀에게는 ’하나‘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선언한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사랑하는 당사자 ‘두’ 사람을 제외한 일체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은 가족도, 국가도, 신분도, 신념도 초월하게 만드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 즉 ‘둘’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열정적으로 저항할 수 있도록 만드는 혁명적인 힘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디우가 사랑을 계속 ‘둘’이라고 정의하면서 ‘둘’에 충실하라고 말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둘’일 수밖에 없는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가족 논리에 포획되었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유아론적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에서도,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그리고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도 여전히 ‘둘’을 지향해야 합니다. 남편은 자식 속에서 자신이나 아내를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아내도 자식 속에서 자신이나 남편을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편과 아내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즉 ‘둘’의 요소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단지 그들은 자식으로부터 자신들 혹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전형적인 유아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우리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내로서 남편을, 어머니로서 자식을, 아버지로서 자식을 진정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이라는 사랑의 진리를 반드시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강신주 / ‘철학, 삶을 만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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