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
<중용>은 그 첫머리를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연다. “하느님의 명령은 인간의 본성 속에 존재한다.(天命之謂性)” 실로 난폭한 전국시대에 이 선언은 눈이 번쩍 뜨이는 새 소식이었다. 난폭한 폭력가나 샤먼들은 더 이상 천명(天命)을 받을 수 없다는 ‘위대한 거부’가 거기 들어있다. 도리어 천명은 사람들의 마음과 직접 소통한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동의를 받지 않는 한, 새로운 권력은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뜻이 여기 깃들어있다. 요컨대 최고 권력의 정당성은 인간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구현할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
한데 하느님의 명령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질서정연한 자연의 변화 속에 그것이 들어있다. 봄에는 꽃이 피어 봄답고, 여름엔 여름답게 숲이 우거지며, 가을은 가을답게 낙엽이 지고, 겨울은 겨울답게 갈무리하면서 끝없이 흘러가는 세월. 이 ‘제 스스로 그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 하느님의 모습이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아득한 태고부터 가없는 미래까지 그 어느 ‘님’이 그토록 성실(誠)하시기에 해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듬을 만드시는가. 그리고 그 리듬의 파도 속에서 헤아릴 수없는 생명체들이 숨을 쉬고 새끼를 낳고 기르며 또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렇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받을 자, 즉 지상의 최고 권력자는 ‘하느님의 성실을 본받는 자’(誠之者)여야 하리라. 곧 새로운 수직적 권력은 하느님(자연)의 성실성을 본받는 자들로 구성될 때만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것이 <중용>의 핵심적 주장이다.)
하느님의 성실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곧 ‘중(中)’이요 ‘용(庸)’이다. 여기 ‘중’은 ‘가운데’가 아니라 ‘적중함’을 뜻한다. 사람마다 때와 처지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이다. 그리고 그 적중한 상태가 일상화되어 몸에 익어버린 상태를 ‘용’이라 이른다. 중용이란 <논어>식으로 하자면 ‘아비는 아비답고, 군주는 군주다운’ 상태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용’을 낚시찌에 비유해 보면 어떨까. 고요한 수면 위에서 낚시찌는 하늘을 향해 곧추 선다. 이 상태가 ‘중’이다.
‘제 자리에 바로서서 기대지 않은 상태’(中立而不倚)인 것이다. 한데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고, 찌는 따라서 요동친다. 그 요동은
물결에 순응하는 것임과 동시에 물결을 거슬러 바로 서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용이란 이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리고 변화하는 공간
속에서 곧추 선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연속과정을 이른다.
그렇다면 삶이란 곧 중을 획득하려고 요동치는 찌의 움직임이요, 죽음이란 찌가 수면 위에 누워버린 데 비유할 만하다.
이처럼 어려운 중용을 인간세상에서 실현한 모범적 정치가로 드는 예가 순(舜)이다. <중용>은 그의 정치를 이렇게 묘사한다.
“순임금은 질문하길 좋아하였고, 주변의 말을 잘 들었다. 남의 단점은 숨겨주고 장점은 떠 높였다. 그리고 사안의 양단을 잡아 그 핵심을 헤아려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이러니 순임금이 순임금일 수 있었다.”
모르는 일은 전문가들에게 자주 묻고, 또 사람들의 조언은 귀담아 잘 듣고, 나쁘고 좋은 것 가운데 적절한 대책을 골라서 정책으로 표출한 것이 그의 중용정치였다는 것.
배병삼/영산대 교수
(2006.11.24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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