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빗자루와 남기호씨

송담(松潭) 2025. 3. 6. 06:11

빗자루와 남기호씨

 

 

새벽에 빗자루질을 하려 6수를 했다. 5번 떨어지고 6번 만에 붙었다. 32세 때 첫 도전을 했다. 6명 뽑는데 105명 남짓이 지원했다. 시험 과목은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배근력, 멀리뛰기.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는 둘 다 1분 62개 이상. 배근력은 180㎏을 당겨야 한다. 만점이 2.75m인 멀리뛰기는 점수제로. 8개월간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헬스장에서 살며 홀로 혹독한 훈련을 했다. 체력 시험 통과.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재수를 선택했다.

 

1982년생인 그때 내 나이 32세, 딸이 3세. 아내와 딸을 위해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장, 직업이 절실히 필요했다. 재수가 3수, 4수, 5수로 이어졌다.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5수 도전도 실패.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네.’ 울산이 고향인 아내가 내게 말했다. “울산으로 내려갈까? 조선소에 취직하는 건 어때?” 나는 6수를 결심했다. 36세. 기적이 일어났다. 그토록 바라던 환경공무관이 된 날, 나는 지구도 껴안을 수 있을 만큼 길어진 팔로 아내를 힘껏 끌어안았다.

 

꿈? 고등학교 2학년 때, 막연히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편지’라는 제목의 대본을 구해 혼자 1인2역 연기 연습을 하던 나. 눈 깜짝할 새 세 아이의 아빠가 된 나는 야광 조끼를 입고 빗자루로 새벽 거리를 쓸고 있다. 거리와 골목을 쓸고, 쓰레기를 줍고…

 

천직. 6수 후, 빗자루질을 한 지 3년째 되던 해 깨달았다. 처음에는 지저분한 일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빗자루질을 하며 지나온 자리를, 청결해진 거리를 문득 별생각 없이 뒤돌아볼 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잔잔하지만 진한 감동과 뿌듯함.

 

새벽 5시, 저절로 눈이 떠진다. ‘오늘도 열심히 일하자. 아이들 생각해서 다치지 말자.’ 다짐을 하고 몸을 이완시키는 스트레칭을 한다. 몇달 전 광주에서 환경공무관이 새벽 작업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벽에는 차들이 세게 달린다. 도로 가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는 비닐에 어떤 날카로운 게 들어 있을지 모른다. 칼, 바늘에 찔리는 사고가 꽤 자주 일어난다. 나도 칼에 손이 베인 적이 두 번 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깨지 않게 나는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고 닫는다.

 

새벽 6시부터 오전 11까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나는 내가 맡은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고 쓴다. 매일 하는 빗자루질. 나는 빗자루질에, 쓰는 행위에 몰두한다. 지루하지 않다. 매일매일 빗자루질을 하며 느끼는 기분은 매일매일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 빗자루와 내일 빗자루가 다르고, 오늘 빗자루질과 내일 빗자루질이 다르니까. 똑같은 거리지만, 똑같은 거리가 아니니까.

 

늘 그곳에 있는 거리의 풍경은 매일 달라져 있다. 계절에 따라, 절기에 따라, 날씨에 따라. 바람이 시시각각 다르고, 햇빛의 투명함 정도가 다르고, 떠 있는 구름의 모양이 다르고, 들려오는 소리들도 다르다. 사방이 트인 곳에서 오롯이 그날의 날씨를 느끼며, 혼자, 무념무상 빗자루질을 한다. 손목이 아프고 쓸어도 쓸어도 줄지 않는 낙엽 때문에, 거리를 지우는 눈 때문에 지칠 때도 있지만 빗자루질이라는 행위는 할수록 날 매료시킨다. 게다가 하고 나면 더 좋은 결실이 분명한 행위다.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

 

내게 빗자루는 군인으로 치자면 총과 같다. 나는 내 빗자루를 내 손으로 만든다. 내 몸 사이즈에 맞게, 빗자루질을 할 때 팔과 손목에 무리가 덜 가게, 최대한 가볍게. 그래서 낚싯대를 손잡이로 쓴다. 내가 만든 빗자루가 아닌 다른 빗자루로 빗자루질을 하면 느낌이 안 산다. 한 달을 채 못 쓰는 빗자루, 가을에는 사나흘밖에 못 쓰는 빗자루. 모두 내 손에서 탄생한 빗자루이지만 똑같은 빗자루는 하나도 없다. 닳아 있는 빗자루를 보면 ‘열심히 쓸었네’.

 

난 짬뽕, 짜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가장 어려운 사람. 그런데 아내와 6수를 선택하는 데는 좁쌀만큼의 망설임도 없었다. 부모님의 근심이자 철부지이던 나는 아내를 만나고 변했다. 내 입에서 욕설이, 거짓말이, 불평이 사라졌다. 나는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 위해서 산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그게 나를 위해 사는 것.

 

새벽 7시, 빗자루질을 하는 내 등 위에서 동이 트고. 문득 뒤돌아다보며. ‘아, 좋다’.

 

 

김숨 / 소설가

(2025.3.6 경향신문)

 

< 2 >

 

세상은 빛나고 있습니다

 

 

여름이었고, 전날 비가 많이 내렸고, 오후 5시쯤 되었으니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파랬죠.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동호대교를 넘어 옥수역으로 가는 길, 열차가 지하를 빠져나와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강 구간'인데요. 그 구간에서 말갛게 씻은 얼굴의 서울을 배경으로 기관사님의 안내 방송이 들렸어요.

 

승객 여러분,

 

그치지 않는 비는 없듯이 나쁜 일도 언젠가는 멈춥니다.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으시고 밖을 한번 보세요. 세상은 빛나고 있습니다.

 

“세상은 빛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지하철 안내 방송에서 들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죠. 모든 비는 언젠가 그칩니다. 그리고 온갖 인간사의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서도, 세상은 분명 빛나고 있습니다.

 

유병욱 / '인생의 해상도'중에서

 

< 3 >

 

벚꽃 구간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욕망이 있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그러니 본능이 원치 않는 일들을 해내야 합니다. 태생적으로 우리의 인생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고통이 기본값입니다. 오히려 행복이 특별한 이벤트인 거죠. 누구나 일어나기 싫은 마음으로 일어나 나를 위해 또는 가족을 위해 밥벌이를 하죠. 하기 싫은 공부를 하고 견디기 힘든 테스트를 견딥니다.

 

매일이 축제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우리가 할 일은, 왜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대체로 고통스러운가 괴로워할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기본값인 고통 속에서 가끔씩 찾아오는 행복에 감사하며 그 행복을 힘껏 음미하는 겁니다. 행복함을 기본이라 생각하면, 조금만 불행해도 그것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벗꽃 구간'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아마 못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만든 말이거든요. 1년이란 시간을 빠르게 놀려서 60초 프레임 안에 집어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365일이 60초에 늘어가는 거니 6일이 1초정도로 줄어들겠군요. 그럼 2초에서 3초, 잠깐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는 구간이 존재합니다. 봄 벚꽃이 피었다 지는 구간이죠. 지금부터가 진짜 봄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자연이 스위치를 켜듯, 남쪽에서부터 차례로 연분홍 빛이 올라봅니다.

 

우리 인생에도 벚꽃 구간이 필요합니다.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밀쳐내듯, 그런 순간순간의 힘에 기대어 우리는 견뎌야 할 것을 더 잘 견뎌낼 수 있습니다. 벚꽃 구간은 길이도, 형태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1년을 준비해서 떠나는 휴가. 완벽한 벚꽃 구간이죠. 사랑하는 친구와의 맛집 탐방. 생각만 해도 행복하네요.

 

어찌 매 순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무게에 주눅 들지 말고, 참았다 마시는 커피처럼, 가끔 볕 좋은 곳에 의자 하나 내놓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행복의 구간을 설정해 보세요. 벚꽃 구간 그 빛으로 쉽지 않은 시대를 건너고, 덕분에 맑아진 눈으로 가끔씩 찾아오는 해상도 높은 순간들을 포착하고, 더 깊숙이 음미하길 바랍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왜 나는 매일이 축제가 아닐까 실망하지 않고, 단정한 쌀밥과 된장국 사이에 가끔 특별한 음식들이 놓이는 식탁처럼, 꾸준히 행복한 하루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 Carl Sagan은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주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고요. 맞는 말이죠. 우주의 시간에서 우리는 잠깐 반짝이고 사라지는 불빛같은 존재입니다. 잠깐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로 명멸하는 점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시간을 마음껏 음미해야 해요. 반짝이다 사라질 점에게, 내일로 미룰 시간이 어디 있나요? 최선을 다해 우리는 눈앞에 놓인 세상을 즐겨야 해요. 요즘 내내 드는 생각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

제때 마시는 커피 한 모금.

아무렇지 않은 동료들과의 점심.

가끔씩 찾아오는 짧은 성취.

다른 도시의 음식과 냄새.

차창 밖으로 손 흔드는 아이.

볼륨을 투둑 올리게 만드는 음악.

다시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한 순간들.

 

유병욱 / ‘인생의 해상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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