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삼웅 / ‘네 칼이 센가, 내 칼이 센가.’중에서

송담(松潭) 2025. 3. 4. 13:05

 

 

< 1 >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연일 계속되었다. 1905년 11월 17일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고려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웠다가 죽이고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국왕으로 등극(1392)한 지 513년 되는 때였다. 이번에는 일제가 고종을 폐하고, 순종을 허수아비로 세우더니,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통치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날씨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날을 우리는 을씨년스럽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이 강제되면서 백성들의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하고 흐린 것을 '을 사년스럽다'고 표현하다가 '을씨년스럽다'로 변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을씨년스러운 서울 장안에 때아닌 귀신 소동으로 백성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장귀라는 귀신이 대궐 문 앞에 자주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귀신을 직접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 귀신은 범호랑이의 앞잡이가 되어 선량한 사람들을 범의 아가리에 밀어 넣는 역할을 하는 못된 귀신이다. 범보다 장귀가 더 무섭다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장귀를 쫓아내면 범은 자연히 자취를 감춘다는 설화도 전한다.

 

사람들은 을사늑약에 서명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오적五賊이라 불렀다. 또 이하영, 민영기, 이재극 등 이들과 친일 매국에 앞장선 자들을 이들과 함께 '장귀'라고 불렀다.

 

< 2 >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만주가 떠들썩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 대한에 의기 남아가 있었구나! 의기 남아가 있구나!"

 

신채호는 여러 날 동안 붓의 효용성에 의문을 품으면서, 자신도 의병에 나서거나 기회를 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생각을 했었다. 다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머뭇거릴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자기보다 아홉 살 어린 안중근이 해외에서 의병중장이 되고, 단지동맹을 하고, 마침내 적귀를 해치웠다니, 부끄러우면서도 속이 다 후련했다. "장하고 장하구나, 안 의사여!"

 

신채호는 안중근이 거사 직전에 지은 「장부가」를 꺼내 소리 높여 읽고 또 읽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우니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기하여 한 번 지나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룰지어다

쥐 도적 이등(伊騰)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固然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동포로다

 

< 3 >

 

『동사강목』은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단군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모두 20권 20책으로 편년체(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기술 방법)기술했다. 안정복이 초고를 쓴 지 22년 만에 완성했다는 노작이다. 신채호는 안정복이 이 역사서를 쓰게 된 동기부터 마음에 들었다. 안정복은 기존의 조선 사서들이 사료 수집이 철저하지 못했고, 서술이 미흡하며, 시비곡직曲直을 제대로 가리지 않아 만족스럽지 못해 직접 『동사강목』을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동사강목』은 저자의 역사의식이 뚜렷하고, 사실 기록도 비교적 적확했다.

 

망명이라는 큰일을 앞둔 시점에 방대한 이 사서를 한 장 한 장 필사했다. 웬만한 노력과 정성으로는 하기 힘든 작업이었다. 신채호는 뒷날 『조선상고사』의 총론에서 "안정복은 평생을 오직 역사학 연구에 전념한 5백 년 이래 유일한 사학 전문가라 할 수 있다. (…) 연구의 정밀함은 선생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 지리의 잘못을 교정하고 사실의 모순을 바로잡는 데 가장 공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기록했다. 신채호 역사연구의 뿌리는 이 책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채호는 필사를 마친 『동사강목』을 물에 젖지 않도록 명주에 몇 곱으로 싸서 괴나리봇짐에 넣고 망명길에 올랐다.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정리한 뒤 그가 유일하게 몸에 지닌 것이었다. 제 나라 역사 필사본 하나만 짊어지고 떠난 망명객은 신채호 한 사람뿐이지 않을까.

 

< 4 >

 

'바다에 접해 있다고 해서 연해주沿海州라 불렀다. 위쪽으로 아무르강이 가로질러 흐르며 경계를 만들었고, 서쪽의 우수리강과 동쪽의 동해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두만강의 하구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이웃한 곳이기도 했다. 그 면적은 한반도의 4분의 3 정도에 이를 만큼 넓었다. 러시아인들은 연해주를 '극동', '원동'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이 지역은 원래 청나라에 속한 땅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아이훈 조약(1858)과 베이징 조약(1860)에 따라 러시아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후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마주하게 되고, 중국은 북태평양 연안국의 지위를 잃었다.

 

연해주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우리의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 무대였다. 본래 연해주 지역은 부여, 북옥저, 고구려, 발해 등 고대 한민족의 생활권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전성기에는 연해주 일대를 지배했다. 그러다가 발해를 끝으로 이 지역의 지배세력은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중국 한족, 만주족, 러시아족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한민족은 지배세력에게 밀려났고, 연해주는 한민족에게 '고토(故土)'의 의미로만 남았다.

 

이 '고토'에 한민족이 다시 하나둘 모여 살았다. 한반도 북부 지역에 홍수와 가뭄이 잦으면서 흉년이 계속되고,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날로 더 심해지자 고국을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수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침탈당한 뒤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연해주를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연해주 이주사는 우리 민족의 만주 지역 이주사와 판박이였다. 희망을 잃은 이들이 희망을 품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고달픈 삶은 어디를 가나 매한가지였지만.

 

신채호는 이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달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신채호는 당분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작심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먼저 고국을 떠나 연해주에 정착한 한인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다.

 

연해주의 대표적인 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처음으로 한인 거주지가 형성된 것은 1890년대였다. 이곳에 집단거주지 곧 '개척리'가 형성되면서 가까운 지역에 동영, 들막거리, 피막동 등의 한인 거류지가 잇따라 생겨났다.

 

그 뒤 1907년경에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는 개척리를 비롯한 집단 거류지가 7개 만들어졌다.집은 1,000여호나 되었고 거주하는 한인도 1만 여명이었다.

 

< 5 >

 

신채호는 김부식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광대한 대륙의 공간을 방치한 채 신라사를 중심으로 『삼국사기』를 편술한 것이 개탄스러웠다. 그래서 “집안현을 한번 돌아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설파했다. 이 때문에 훗날 김부식의 후손들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았으나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채호가 망명객의 신분으로, 그것도 성치 않은 몸으로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실지 답사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역사 연구의 고증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역사 연구에서 실지 답사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적을 일일이 실지 답사하며 문헌의 부족을 깁고, 착오를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사학자 정인보는 신채호의 역사 연구가 유적 답사와 문헌의 비교 고찰에 의한 확고한 실증 위에 기초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누구도 밝히지 못한 사료를 얻고 우리 옛 유적지를 직접 보고 자기 이론을 확립하면서 신채호도 스스로 기뻐했을 것이라고 했다.

 

식민사관에 물든 일부 학자들은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를 두고 '실증'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유적지 답사에서 얻은 '실증만으로도 섣부른 문헌 고증보다 더 견고한 실증 위에서 연구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를 비판하는 이들은 신채호의 사서가 각주만 없을 뿐이지 그의 역사 연구는 문헌과 유적 답사에 의한 실증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신채호는 광활한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탐사하면서 선조들의 숨결을 느꼈다. 특히 을지문덕장군의 위대한 업적들을 떠올렸다. 장군의 위업을 잇지 못한 자신을 포함한 무능한 후손들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 6 >

 

임시의정원이 구성되면서 신채호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의원과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소집된 한성정부국민대회에서는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망명정부라 세비도 수당도 없는 감투였다. 그래도 관직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의정원 의원들은 밤을 새워 논의했다. 모두 피곤한 줄도 몰랐다. 마침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10조로 된 약헌(헌법)을 심의해 통과시켰다. 국치 9년 만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세상에 선포했다.

 

이는 오로지 국내 동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들고 일어선 3.1 혁명 덕분이었다. 여기에 조소앙의 노고가 더해져 빠른 시간에 임시정부의 기틀이 마련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구성 법안들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이것들을 모두 꾸준히 준비해 온 조소앙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임시정부라는 큰 틀을 완성했다는 기쁨도 잠시, 신채호는 곧 심기가 크게 뒤틀렸다. 행정부의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잡음이 생겼다. 그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연초(1919)에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 대신 국제연맹을 움직이는 미국이 맡아 달라는 '위임통치'를 청원했던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채호다운 직설적인 말로 강하게 비판했다. "과거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 씨는 아직 찾지도 못한 나라를 팔겠다는 사람이오. 이런 인물을 임시정부의 최고 수반으로 추대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오?"

 

의정원 의원 대부분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제대로 모르는 듯했다. 이승만을 추대하려는 일부 인사들만 웅성웅성할 뿐 별다른 대꾸도 없었다. 잠시 뒤 정적을 깨고 누군가가 발언권을 얻어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물로서 향후 우리나라가 외교적으로…………." 그는 허접한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신채호가 듣기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신채호는 끝까지 극렬하고 단호하게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의정원은 국무총리 선출 방식을 바꾸었다. 국무총리 후보를 상호추천하고, 그중에서 세 명을 공천 후보로 의결한 뒤에 최종으로 무기명 단기식 투표를 통해 다시 선출하기로 했다.

 

신채호는 미국에서 무장투쟁론을 제기하며 독립운동을 지도해 온 박용만을 추천했으나 최종 공천 후보 세 명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선출 방식을 바꾸어 투표했으나 결과는 그대로였다. 초대 국무총리로 이승만이 선임되었다. 투표로 선출되었기에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의정원은 어렵게 첫발을 내디었다. 의장에 이동녕,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비롯해,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부총장에 신규식, 법무총장에 이시형, 재무총장에 최재형, 군무총장에 이동휘, 교통총장에 문창법이 선임되었다.

 

신채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직 찾지도 못한 나라를 팔아먹으려던 이승만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절차에 따른 동지들의 선택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결정을 따를 수는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선임된 뒤에도 그대로 미국에 머물렀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오지 않고 부임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각부 총장들도 대부분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 있어서 빨리 오지 못했다. 미국에서 달려온 안창호가 국무총리 대행을 겸임했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는 물론 한성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에서도 각각 정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마흔네살의 젊은 나이에 이런 최고의 직위를 맡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 고위 관직을 지낸 적도 없고, 조선 말기의 애국계몽운동이나 의병항쟁 등에도 참여한 바가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그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 모습이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외교론'에 기울어져 있었다. 특히 미국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많았다. 무장투쟁을 통해서는 독립할 수 없으니 외교(미국)의 힘을 빌리자는 논리였다. 당연히 그때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미국을 잘 알고 미국과 친할 것이라 믿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했다.

 

< 7 >

 

베이징의 이회영 집은 어느새 독립운동가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지역과 계층, 나이에 상관없이 독립운동가들이 베이징에 오면 그의 집에 들렀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까지 머물다 갔다. 신채호와 김창숙은 물론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도 그의 집 신세를 졌다.

 

재산이 바닥나 궁핍했어도 이회영 내외는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을 흔쾌히 대접했다. 부인 이은숙은 남편과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몇 차례나 비밀리에 고국에 들어와 친정에서 자금을 갖고 오기도 했다. 마을의 텃밭에 배추를 심어 독립운동가들에게 김치를 담가 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은숙도 정승의 외동딸로 곱게 자랐지만, 어느새 남편 못지않은 여걸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이은숙이 뜬금없이 신채호에게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단재 선생, 내가 봐 둔 처자가 한 명 있는데 결혼을 하시면 어떨까요?" "저의 처지를 잘 아시면서, 결혼이라니요."

"아니지요. 어려운 형편은 다들 같이 겪는 일이고, 앞으로 하실 일이 많을 텐데, 건강을 살피시려면 가정을 갖는 것이 중요하죠. 우당공 하고도 이미 다 상의한 일이에요."

 

이은숙이 말한 여성은 박자혜였다. 3.1 혁명 때 서울에서 간우회 사건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른 여성이었다. 간우회 사건은 당시 간호사였던 박자혜를 중심으로 주요 병원의 간호사들이 파업과 태업을 벌인 일을 말한다. 이후 박자혜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펑톈을 거쳐 베이징으로 망명해서 옌징대학 의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기구한 명운을 타고나기도 했다. 그때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박자혜는 일곱 살 때 궁궐의 조대비조선 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처소에 애기나인어린 나인으로 입궐했다. '나인'은 궁궐 안에서 왕과 왕비를 가까이 모시는 이들을 말한다. 조대비가 죽고 나서는 윤대비순정황후 처소로 옮겨 갔다. 국치 직전에 윤대비가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을 내려, 숙명여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다. 숙명여학교를 졸업(2회)한 뒤에는 총독부가 세운 병원에서 일하면서 3.1 혁명에 뛰어들었다. 박씨 가문은 딸과 사위의 독립운동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신채호는 그때 마흔 살의 홀아비였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망명객이었다. 게다가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성마르며, 살갑지 않은 성품까지 갖춘, 누가 봐도 박자혜의 결혼 상대로는 한참 부족한 사람이었다.

 

박자혜는 신채호를 알고 있었다. 그가 국내에서 신문과 <신여성≫에 쓴 글을 읽었고, 그동안의 행적도 귀동냥한 바가 있었다. "금강산 단풍 구경보다 몽골 사막풍에 흉금을 펼치고 싶다"라고 하던 그 사람이 아닌가.

 

신채호는 이은숙의 소개를 거절하지 못했다. 얼마 뒤 박자혜를 만났다. 박자혜는 금방 마음을 열었다. 어렵지 않게 우국지사와 애국 여성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자혜가 마음을 연 날, 남편 될 사람이 말했다. "나는 가정에 등한한 사람이니 미리 그렇게 알고 마음에 섭섭히 생각 마시오."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치시키는 남자와, 그런 사내를 마다하지 않은 여성의 만남이었다. 운명과 숙명 사이에서 만난 두 사람의 '부부의 연'이었으나 부박한 세상 좀팽이들의 백년가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엄숙하고도 순정한 노력으로 저분을 내 낭군으로 섬기리라.” 박자혜는 몇 번이고 마음에 다짐했다.

 

< 8 >

 

허약해진 체력에도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신채호는 8년여의 세월을 버텼다. 일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윤봉길과 이봉창, 안중근과 신채호 같은 인물들이라면 치를 떨었다. 자신의 안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감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뤼순 형무소에서 갑자기 박자혜에게 전문을 보냈다. "신채호 뇌일혈로 위독."

 

당시 신채호는 쉰일곱 살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고 힘겨운 망명 생활과 긴 옥고로 많이 쇠약해지긴 했으나 큰 질병을 앓지는 않았다. 질병이 있었으면 부인이나 지인들에게 필요한 약의 차입을 부탁했겠지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홍명희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출감하면 『대가야천국고』와 『정인홍 약전』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비록 망명가의 감옥수라는 '이중 망명'의 신분이었으나 결코 쉽게 쓰러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뇌일혈로 위독"이라니.

 

일제는 조선의 큰 인물들을 살려두지 않았다. 전봉준과 안중근은 살려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감옥에까지 밀정을 투입하여 회유했으나 그들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곧바로 처형했다.

 

신채호가 10년 형을 마치고 베이징이나 상하이로 귀환하면 조선인은 물론이고 중국인들로부터도 영웅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한 나라의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동방연맹'을 통해 국제적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일제에게 이런 신채호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하는 일이었다.

 

신채호는 일어는 물론 영어와 중국어는 물론 에스페란토어까지 구사하는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의 주무기는 아나키스트 사상이 아니던가.

 

박자혜는 남편의 위급 전보를 받고 아들 수범과, 남편의 친구 서세충과 함께 뤼순 형무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탈 때부터 종로경찰서 형사 두 명이 뒤따랐다. 일행은 2월 21일 오후 2시경에 어떤 독방으로 안내되었다. 병실인지 감방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온기 하나 없는 시멘트 바닥의 다다미 위에 신채호가 누워 있었다. 원래 허약한 사람이었지만 뼈만 앙상했다. 그토록 그리던 아내와 아들이온 줄도 모르는 듯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가족 면회였으나 형무소장과 의사, 간수들까지 모두 들어와 있었다. 신채호의 눈은 감겨 있었다. 박자혜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았다. 남편이 눈을 뜨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네 왔는가. 수범이도 왔느냐” 할 것 같았다. 그러기를 기대했다. 이미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아들의 손을 잡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곡성을 내면 즉시 쫓아낸다는 조건부 면회였기 때문이다. 박자혜는 운명을 앞둔 남편 곁에서 통곡도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서세충이 의사에게 신채호가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의사는 앞으로 한두 시간 정도, 길어도 오늘 밤 자정을 못 넘길 것 같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형무소장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운명 순간까지만이라도 곁에 있게 해달라고. 일제는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가족은 곧 면회 시간이 끝났다며 감방에서 내쫓겼다.

 

신수범은 이때 잠시나마 볼 수 있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아버님 단재」라는 글로 남겼다.

(...생략...)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사인이 인위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

 

신재호는 평소 면회 온 지인들에게 '생전에 조국 광복을 못 볼진대 왜놈들의 발끝에 차이지 않게 유골을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라고 했다.

 

박자혜의 생각은 달랐다. 남편의 유골이라도 고국으로 모셔 가고 싶었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해방의 그날이 오면 동포들이 의롭게 살다 비명에 간 남편의 묘소를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화장을 하고 유해를 남편의 고향으로 모셔 왔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향리에 안장하려 했지만, 호적이 없는 무국적자라 하여 총독부가 매장을 허가하지 않았다. 한용운이 벌석하고 오세창이 '단재신채호지묘'라고 서각한 것도 세우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낭성면 면장이 의기 있는 족친이어서 '공개된 암장'을 했다.

 

이 일은 곧 탄로 났다. 면장은 파면되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마저 심한 고초를 당했다. 신채호는 살아서도 험난한 길을 걸었고, 죽어서 가는 길도 평탄하지 못했다. 정도가 사라지고 패도가 판치는 시대에 선지자와 참지식인이 겪는 운명이었다.

 

박자혜는 3.1 혁명 당시 학생들을 독립시위에 동원하고 앞장섰던, 참으로 똑똑하고 씩씩한 신여성이었다. 신채호를 만나 결혼하면서 그의 삶은 온통 빈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남편이 투옥되던 해 12월, <동아일보> 기자가 <신채호부인 방문기>를 썼다. 내용이 길어서 기사 중 일부만 발췌한다.

 

"굶어 죽어도 사나이 자식은 글을 배워야 한다 하여 없는 것 있는 것을 다 털어 교과서를 겨우 사서 큰아들 수범 군을 교동보통학교 2학년에 통학을 시키는 중이나 어머니가 굶으니 수범 군도 굶고 다니는 날이 태반인 데다가 옷 한 벌 변변히 얻어 입지 못하고 남과 같이 학용품 한가지 사서 쓰지 못하여 추루한 기상은 이웃 사람도 찾아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수범 군은 어머니에게 효성이 갸륵하여 말썽부리는 일 한번 없고 어머니가 혹 나갔다 늦게 돌아오면 언제까지든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린다는데 그의 나이는 금년 여덟 살이라 하여 그 밑으로 두범 군이 있으니 그는 당년 두 살로 아버지의 얼굴 한 번도 못 보았다 한다.

 

다롄이야 오직 춥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하며 박여사가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잊고 훌쩍거리는 그 광경에는 어언간 동정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편지 한쪽에는 조선옷에 솜을 많이 놓아 두툼하게 하여 보내 달라는 부탁이었으나 우선 어린아이들 거느리고 살아갈 길이 망연하니 옷 한 벌 부칠 재료가 있을 리 없다.

 

서리치는 아침 눈보라 날리는 저녁에 그의 심경이 어이하리. 지금 있는 집도 어느 아는 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좁다란 방 한칸에 6원 50 전씩을 주어 왔으나 이제는 그것도 여의치 못하여 석 달 동안이나 지불치 못하고 있으매 날마다 성화같은 집주인의 독촉에는 굶는 것보다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만리타향에서 온갖 고초를 다 바쳐 가며 전전유리하던 그 부부의 생활이나마 오랫동안 계속하는 운명을 가지지 못했다. 북경 이역의 생활을 떠난 신채호는 홀로 남아 있고 박자혜 여사만 둘 사이에 생긴 수범 군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아무리 세상에 뜻이 있어 떠돌아다니는 그인들 생활의 도리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젖내 나는 어린아이와 젊은 부인을 전별할 때에 그의 애가 끊어졌을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박자혜 여사가 어린아이를 안고 본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본래부터 빈한한 친정에는 의탁할 여지가 없어 이리저리 아는 사람의 신세를 지고 다니다가 친척의 관계로 알음이 있는 모씨의 집에서 몇 해 동안을 거주하게 되었으나 자기 혼자 몸도 아닌 그는 주인이 아무리 관대한 대우를 한다 하여도 전부가 자기의 뜻과 같을 리도 없으려니와 그도 오랫동안 계속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작년 동지달 그믐날에 이사를 하게 된 것이라 한다."

 

“겨우 피가 마른 수범 군을 북경에서 떨쳐 보낸 신채호는 몽매에 그린 것이 그의 아내와 아들이어서 한번 오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수범 군의 사진을 보여 달라는 편지가 왔다. 고초에 고초를 거듭하던 박 여사는 그 소식을 듣기가 바삐 수범 군을 데리고 다시 북경의 길을 떠나 오랜만에 만난 가장과 기쁜 눈물에 젖은 생활을 얼마 동안 계속하기는 했으나 다른 곳에 뜻을 두었던 신채호가 그 처지에 구속을 받고자 아니했으니, 이것이 그가 애인 박자혜와 두 번째 생이별을 하게 된 바이었다.

 

다행히 다시 사랑의 씨가 맺어져 두범 군이 생겨나서 방금펄떡거리며 노니는 것도 보는 사람의 눈물을 금하지 못한다. "

 

< 9 >

 

박자혜는 남편이 죽은 뒤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아 사부곡을 지었다.

 

밤도 깊어 가나 봅니다. 우리 몇 식구가 깃드린 이 작은 방은 좁고 거츠른 문창이 달빛에 밝게 물들었습니다. 수범이 두범이도 다 잠이 드렀소이다. 아까까지 내가 울면 따라 울드니만 인제 다 잊어버리고 평화스런 꿈세상에서 숨소리만 쌔근쌔근 높이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남겨 놓고 가신 육체와 영혼에서 완전히 해탈된 비참한 잔뼈 몇 개를 집어넣은 궤짝을 부둥켜안고 마음 둘 곳 없어 하나이다.

 

작은 궤짝은 무서움도 괴로움도 모르고 싸늘한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뜻을 못 이루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시드니 왜 이렇게 못난 주제로 내게 오셨습니까. 바쁘신 가운데서도 어린 것들을 유난스레 귀중해 하시고 소매동냥이라도 해서 이것들을 외국 유학을 시킨다고 하시든 말씀은 잊으셨습니까? 분하고 원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원통한 고혼은 지금 이국의 광야에서 무엇을 부르짖으며 헤매나이까?

 

나는 불쌍한 당신의 혼이나마 부처님 품속에 평안히 쉬이도록 하고저 이 밤이 밝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동대문 밖 지장암에 가서 마음껏 정성껏 애원하겠나이다.

 

당신과 만나기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일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39세요, 나는 스물네 살이었지요. 무엇을 잡아 삼킬 듯 이 검푸르든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 가고 황토색 강물도 콸콸 넘치게 흐르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 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북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하이에서 북경에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해를 겨우 함께 살다가 다시 상해로 가시고 나는 두 살 먹이와 배 속에 다섯 달 되는 꿈틀거리는 생명을 품어 안고 몇 년을 떠나 있던 옛터를 찾게 되었지요.

 

그 뒤에는 편지로 겨우 소식이나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당신은 늘 말씀하셨지요. 나는 가정에 등한한 사람이니 미리 그렇게 알고 마음에 섭섭히 생각 말라고……………

 

아모 철을 모르는 어린 생각에도 당신 얼굴에 나타나는 심각한 표정에 압도되어 과연 내 남편은 한 가정보다도 더 큰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구나 하고 당신 무릎 앞에 엎드린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열과 성의와 용기를 다 어떻게 했습니까? 영어의 몸이 되어서도 아홉 해를 두고 하루같이 오히려 내게 힘을 보내려고 하는데 전보 한 장이 왔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무엇이라 하리까. 어쨌든 당신이 위급한 경우에 있다는 것이라 세상이 캄캄할 뿐이니 거저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어떻게 되든 간에 수범이를 데리고 그날로 당신을 만나려고 떠났습니다.

 

뤼순 형무소에 닿기는 그 이튿날 2월 19일 오후 3시 10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벌써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5년이나 그리든 아내와 자식이 곁에 온 줄도 모르고 당신의 몸은 프르팅팅하게 성낸 시멘트 방바닥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지요. 나도 수범이도 울지를 못하고 목메인 채로 곧 여관에 나와서 하루밤을 앉아서 새우고 그 이튿날 아홉 시 되기를 기다려 다시 형무소에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고 면회를 거절하겠지요. 물론 비참한 광경을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관리들의 고마운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세상을 아주 떠나려는 당신의 임종을 보지 못하는 모자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당신은 그날, 그날은 2월 21일 오후 4시 20분에 영영 가버리셨다구요. 당신의 괴로움과 분함과 설움과 원한을 담은 육체는 2월 22일 오전 열한 시 남의 나라 좁고 깨끗지 못한 화장터에서 적은 성냥 한 가지로 연기와 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여! 가신 영혼이나마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누가 이 여인의 한과 잃어버린 삶을 보상해 줄 수 있을까.

 

"누가 처자를 어여삐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열사가 나라를 위함에는 가족까지 희생하는 법이니, 나라 사랑과 아내 사랑은 같이할 수 없다. / 신채호, 『꿈하늘』.

 

< 10 >

 

'역사가 된 사가(史家)'의 혼령이여!

 

장엄한 삶이었다. 한 시대, 그것도 가장 참담했던 시대에 국민의 정신사적 기축基軸이 되었다. 청렬한 지조와 청려한 붓은 식민지 시대 민족의 한줄기 광망이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계속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남긴 일련의 선언문과 각종 문헌과 사론·사서는 소중한 민족혼의 원천이 되었다.

전근대의 철문을 연 계몽주의자, 치열한 항일구국 언론인, 담대한 애국문사, 주체적 민족주의자, 전위적인 독립운동가, 근대사학의 개척자, 국제주의 아나키스트.

 

패배와 역경의 삶은 오히려 섬광이 되고, 쌓인 업적과 공적은 애국심의 사표가 되고, 준열한 정신과 담대한 실천성, 그리고 사심 없는 행동의 궤적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지식인의 척도가 되신 분.

 

선생은 국난을 당하여, "현실에서 도피하는 자는 은사이며, 굴복하는 자는 노예이며, 격투하는 자는 전사이며, 우리는 이 삼자 중에서 전사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전사가 되셨던 분.

 

57년의 생애를 오로지 '일직선'으로 살면서 삿됨과 사특함을 배제하고, 곁눈 팔지 않고, 그러고도 시대적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을 동시적으로 촉발케 하고, 왜놈과 싸우는 전선에서도 유가의 5덕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을 지킬 수 있었던 분, 그런 삶의 원천은 무엇일까. 책의 서두에 던졌던 의문 앞에 다시 선다.

 

때론 자부심이 강해 오만에 가까웠고, 신념에 차서 고집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결기가 있었기에 '단재라는 실존'을 지켰던 선생.

 

선생은 소설 『꿈하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상징적으로 적시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았던 것 같다.

 

내가 살면 대적이 죽고

대적이 살면 내가 죽나니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대적아 대적아

네 칼이 세던가 내 칼이 센가 싸워 보자

 

선생은 칼을 들고 왔다. 날이 번쩍이는 청룡도가 아니라 날선 붓칼이었다. 천년 풍상風霜에도 조금도 녹슬지 않고 백년 궁핍에도 날카로운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칼이었다. 꺾이지도 휘어지지도 않았다. 도저한 붓은 사필史筆이 되고, 준열한 사론은 민족사학 또는 근대사학의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이상 열거한 것은 문학·언론·독립운동·아나키즘의 광맥을 제외한 사학의 한 줄기일 뿐이다.

 

처자를 고국으로 보내고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걸식도 가하거니와 그래도 이완용·민영휘의 밥을 구걸할 수 없은즉 자살과 아사의 결심도 알아야 할 것"이라 토로하고, “조국의 역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자주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라고 하면서 조선사를 썼던 선생.

 

그러면서 "조선 역사책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 한이노라"라고 감옥의 고충보다 역사 연구의 기회를 빼앗긴 것을 더욱 가슴 아파했던 당신.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 지금도 감투와 돈에 눈이 먼 비루하기 그지없는 일부 지식인·언론인들의 모습과 대비해 본다.

 

평생을 반제반봉건·반식민 투쟁의 전위가 되면서도 ‘그'이후'를 대비하여 무강권·무지배·무착취의 아나키적 이상을 추구했던 사상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청고한 기품과 기상을 잃지 않으면서 엄숙하고도 순정한 노력으로 언론·사학·독립운동에서 일가를 이루고, 사생활이 근검하고 엄결하여 선비의 환생을 보여 주신 단재 선생!

 

1927년 처형대에 선 이탈리아 출신 아나키스트 바르톨 로미오 바젠트의 유언을 단재 신채호 선생 영전에 바치면서 '역사가 된 사가'의 글을 마무리한다. "당신들이 나를 두 번 처형한다 해도 내가 올바로 살았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