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칼럼, 정의

시대정신이 사라진 나라

송담(松潭) 2024. 4. 28. 20:25

시대정신이 사라진 나라

 

 

한때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요한 선거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시대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에야 날개를 펴듯, 시대정신은 그 시대가 저물 때에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헤겔은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미리 알아채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비밀을 먼저 손에 쥐면 시대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할 자신이 있든 없든, 일단 그것을 천명하려고 노력했다. 권위주의에서 보통사람들의 시대로, 다시는 군인이 권력을 잡을 수 없는 문민통치의 시대로, 평화적 정권교체로 증명된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고 관치를 넘어 공정한 시장경제의 틀을 만드는 것, 선거 때 표만 던지는 유권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민주주의, 이런 것들이 시대정신이었다.

 

어느 순간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시대는 역행했다.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은 박정희 개발독재 모조품이었고,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향수의 결정체였다. 민주화 이후 30년 만에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을 탄핵했지만, 앞당겨 치른 대선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묻는 리더는 없었다. 탄핵 후의 정부는 부패를 청산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적폐청산’이 어떻게 시대정신이 될 수 있겠는가. 다음 정권도 전 정부 탓만 하며 2년을 보냈다. 그렇게 시대정신은 사라졌다. 모든 것이 무너졌고,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시대정신이 사라지자 선거와 정치는 ‘비전’ 경쟁이 아니라 그저 상대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번 총선도 시대정신의 부재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정권심판, 운동권심판, 이·조심판 등 심판만 넘쳐났다. 선거는 ‘평가’일 수 있다.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거나, 엉뚱한 비전을 시대정신으로 착각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민주적 절차다. 그러나 심판은 그렇지 않다. 심판은 사법절차처럼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고 거기서 멈춘다. 심판에서 승리한 세력은 그 정치적 재판 결과에 만족할 뿐 시대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탄핵 이후 우리에게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포용국가는 시대정신이 될 수 없었다. 성장전략이나 분배원리라고 하기에도 실체와 위상이 모호했다. 공정? 공정이 어떻게 한 국가의 비전이 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문재인 정부의 포용과 공정은 서로 상충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단순히 개인들의 이기심과 비도덕이 빚은 결과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향한 무한경쟁의 산물이었다. 세월호가 그래서 침몰했고, 정유라는 ‘빽’도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 늘어나는 자살과 줄어드는 출생, 초등학생들의 꿈이 건물주인 나라, 모두 삶의 가치가 사라진 세계의 결과물이었다. 홍세화 선생이 말한 ‘부자되세요’ 이데올로기의 완전한 승리였다. 개천에서 다시 용 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공정은 능력주의의 다른 말이었다. 불에 기름을 끼얹은 모양새였다.

 

오독한 시대정신의 귀결은 정권교체였다. 윤석열 후보는 문재인 정부 용어를 제 것으로 만들었다. 검사 손에 쥐어진 적폐청산과 공정이라는 칼은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지금 보는 대로다. 청산과 심판의 정치는 양극화와 포퓰리즘, 팬덤을 만나서 괴물이 됐다. 대통령은 통치에 관심이 없고, 검찰은 칼춤을 추고, 야당은 심판을 외칠 뿐이다. 우리의 시간은 2016년 겨울에 아직도 멈춰 있다.

 

정책이 없는 총선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정책은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시대정신이 먼저 서고, 그 비전을 구현하는 도구로 제시되는 것이다. 방향이 없는데 무슨 정책이 있겠는가. 공산전체주의와 싸우기 위해 자유의 연대를 만들고, 자유를 방해하는 카르텔을 사법 권력으로 처단하자는 식의 아무 말을 국정기조라고 착각하는 정권에 무슨 정책을 기대하겠는가. 야당은 다른가. 한국에서 성장의 시대가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고, 대기업들이 해외에 대규모 투자를 시작한 시점에, 25만원 지원금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대안일까. 아이 낳으면 돈 준다는 식의 저출생 극복 대책에는 어떤 시대정신이 담겨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은 아무런 방향도 없이 그저 물 위를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멍텅구리 배 같다.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 길에 폭풍우를 어떻게 피할 것인지, 힘들 때 어떻게 연대하고 공존할지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빵과 잠자리를 두고 서로를 적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패를 갈라서 물어뜯는 중이다. 한때는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너무 진부했다. 그 진부한 말이 이제는 아려온다.

 

이관후 / 정치학자

(2024.4.26 경향신문)

 

 

< 2 >

 

‘가속노화’ 시대의 기묘한 ‘세대공감’

 

나는 고전평론가다. ‘고전의 지혜’를 현대인의 ‘삶의 현장’과 연결시켜 주는 전령사라는 뜻이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냥 백수다. 또 사회적인 범주로는 60대 독거노인이다. 좀 처량해 보이지만 나름 ‘명랑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1인 가구가 대세가 되었고, 그것도 전 연령에 걸쳐 있다고 한다. 그럼 이렇게 분화된 1인들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것은 정치경제학을 넘어 인류학적 과제에 속한다. 이런 차원에서 일단 내 주변의 상황부터 추적, 관찰을 시도해 보았다.

 

나의 일상은 주로 남산 아래 필동에 있는 공부공동체(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이뤄진다. 감이당은 6080세대가, 남산강학원은 2030세대가 주를 이룬다. 세대 간 장벽이 두꺼울 법도 한데, 현장은 의외로 잘 ‘통’한다. 채널은 대략 세 가지다.

 

첫째, 신체 상태. 6080은 말한다. 나이 드니까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어! 관절염에 임플란트, 갑상선 장애에 불면증까지. 2030은 응답한다. 저희도 그런데요. 아토피는 기본이고 골다공증에 이명, 대상포진까지. 아니, 그 팔팔한 나이에 왜? 소위 ‘MZ세대’는 디지털 세상에 태어나 몸을 쓸 기회가 거의 없었고 영양과잉에다 각종 MSG에 길들여져 있다. 면역계는 물론이고 근골격계가 심각하게 허약하다. 노년내과에선 이런 증상을 ‘가속노화’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지금 청년들은 겉은 ‘브링브링’하지만 속은 ‘골골하는’ 셈이다. 그에 비하면 6080은 단군 이래 가장 활기찬 노년에 속한다. 육체노동의 시대에 성장했고 가난해서 먹을 게 넉넉하지 않았다. 또 산전수전을 두루 겪다 보니 기본 뼈대가 튼실한 편이다. 노화가 시작될 즈음 디지털 문명을 만나 고단한 육체노동에서 벗어난 것도 큰 행운이다. 결국 청년은 가속노화, 중년은 자연노화! 결국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된 것. 자연히 서로 주고받을 이야기가 넘쳐난다.

 

둘째, 내면 풍경. 우리 시대 청년들은 인정욕망에 시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다. 20세기에는 먹고살기가 어렵다 보니 도처에 공동체가 있었고, 게다가 함께 연대해야 할 시대적 미션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현장과 배치는 완전히 증발했다. 남은 건 오직 게임이다. 부동산, 주식, 코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의 모든 것이 게임이다. 노래도 게임, 연애도 게임, 행복도, 몸매도 다 게임이다. 우리나라가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를 뒤흔든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결말이 그렇듯 중도 탈락자건 최후의 승자건 결론은 처참하다 - 죽거나 나쁘거나! 하여, 청년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불나방처럼 게임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청춘의 에로스를 발산하기도 전에 이미 영혼이 탈탈 털린 셈이다. 한편, 중년들도 ‘깊은 공허’에 빠져 있다. 그동안 죽도록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시대적 미션까지 수행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다 갱년기가 되자 문득 일도 가족도 미션도 다 증발해 버렸다. 한데 100세 시대란다. 살아갈 날이 아직도 한참이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이 막막함과 헛헛함이 다시 2030과 6080을 이어준다. (이하 생략)

 

 

고미숙 / 고전평론가

(2024.4.29. 경향신문)

'명칼럼, 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세화/'생각의 좌표'중에서  (0) 2024.05.15
그러나 문학은 기적적이다  (1) 2022.11.28
6월이 다가 오고 있다  (0) 2022.06.21
환상적인 작별  (0) 2022.02.26
패싱, 내가 나일 수 없는 세계  (0) 202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