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칼럼, 정의

6월이 다가 오고 있다

송담(松潭) 2022. 6. 21. 14:53

6월이 다가 오고 있다

 

지 교헌

 

용산 전쟁기념관에 설치된 한국전쟁 조형물.

사진출처 : 2010.6.20 경향신문

 

 

세상에는 슬픈 일도 많다. 그것은 나의 슬픔일 수도 있고 남의 슬픔일 수도 있다. 남의 슬픔도 내가 슬퍼하면 나의 슬픔이 될 수 있어서 굳이 남의 슬픔이라고 외면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정신적 고통이나 슬픔을 맞이하여도 잘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 듯하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쓰라린 고통이 없으면 슬픔을 모르고 지나기도 하고 어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넘기고 만 것 같다. 다 같은 일이라도 정신적 고통이나 슬픈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충격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영국출신의 세계적 대문호(大文豪)로 알려진 셰익스피어는 이른바 4대 비극을 창작하여 극중의 주인공들이 겪는 슬픔을 통하여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고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문학작품이며 허구(虛構; fiction)이며 실화가 아니고 역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슬픔의 한계가 있다.

 

시간은 많이 흐르기도 하였다. 나는 또 다시 6월을 맞이하며 ‘6.25’를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며칠만 있으면 그날이 오고야 만다. 그리고 어렴풋이 내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슬픔이 되살아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6.25’는 한국전쟁이며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으며 3천만 동포의 가슴 아픈 슬픔이요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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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서로서로 폭력과 무력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인명을 빼앗고 빼앗기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무력행위이며 폭력행위이다. 전쟁에서는 일단 승리해야 한다는 대명제가 있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이라는 상대방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쫓아내고 죽이고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너무나 비인도적인 수단으로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공격하고 살육(殺戮)하기 쉽기 때문에 국제법에서는 일정한 규칙이나 기준을 요구하고 그것을 지키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만일 그것을 지키면 조금이라도 불리하고 나아가서는 패배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일정한 전투원뿐만 아니라 비전투원에 이르기까지 승자의 오만하고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갖은 굴욕과 비인도적인 피해를 감수하고 나아가서는 목숨까지 빼앗기는 수가 허다하다. 이리하여 일단 전쟁이 발발하기만 하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모든 것을 바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아무리 많은 물자를 소비하고 인명을 바치더라도 승리한 장군은 영웅이 되고 패배한 장군은 죽일 놈이 되고 심지어는 역적이 되고 사형수가 되어 교수대에 올라가기도 한다. 승자들은 힘이 정의(Might is right)라는 망언을 믿고 외치기도 한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온 천지가 피로 물들고 물질이나 정신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나 모두 짓밟히고 오직 원초적이고 야수 같은 본능과 파괴와 살육과 비극만이 활개를 친다.

 

이리하여 현명한 국가지도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전쟁을 억지하고 예방하고 기피하기도 한다. 개인의 존엄과 생명과 이해관계를 침범하지 않고, 이웃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고 파괴하지 않기 위하여 갈등과 충돌을 피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는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작게는 동족끼리, 크게는 국가끼리, 나아가서는 동맹국이나 연합국이 결성되어 집단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확보하기도 하고 부당한 침략을 받는 국가를 돕기 위하여 제3국의 군사적 물질적 지원이 동원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전쟁은 대규모적으로 공격하고 파괴와 살육을 저지른다. 여기에 상상할 수도 없는 무기가 등장하고 전투원이 아닌 어린이와 늙은이까지 대량적으로 아사하고 부상하고 살육을 당하는 것이 예사롭게 되고 당연시 된다. 전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인류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며 대재앙이다.

 

1950년 ‘6.25한국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 될 전쟁이었다. 왜 하필이면 동족을 향하여 총칼과 대포와 탱크와 폭탄을 가지고 공격하고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해야 하는가.

 

‘한국전쟁’의 표면이나 이면에는 이른 바 이념(이데올로기; Ideology)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도대체 그 이념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인민민주주의’라는 것이고 인민을 해방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자본주의경제질서와 봉건윤리(?)로부터 인민을 해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대로 자본주의에 모순이 있고 봉건주의에 모순이 있다면 단호히 모순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순의 타파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될진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전쟁이나 유혈혁명은 정당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이념이라면 그러한 이념은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파괴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이념을 표방한 혁명이나 전쟁으로 희생된 생명이 최소한도로 셈하여 수천만 명이라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무리 이념이 아름답고 이상적이고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이 이념을 파괴하는 수단이라면 그 수단이 어찌 정당한 수단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인가. 궁극적 목표나 이념을 파괴하는 수단적 목표나 이념은 결코 성립될 수가 없고 정당화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단순히 이념을 위하여 태어나고 이념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존재는 아니다. 아무튼 인간은 서로서로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고 소질과 취미와 가치관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 그 서로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어찌 한 곳으로 치우친 이념의 실천을 위하여 형제자매와 동족의 생명을 빼앗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른바 ‘6.25사변’이니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북한의 남침전쟁은 목적과 수단이 조화될 수 없는 모순과 부조리의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었다.

 

어떤 정치세력이 이념을 내세우는 것은 때에 따라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자하는 사리사욕이거나 당리당략의 행동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리사욕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나 평등이나 해방이나 지상낙원이나 모두 인간의 생명을 대신하고 인간의 생명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오류요 허위요 기만이요 사기요 조폭이요 야만이요 모순이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 아닌가.

 

1950년 한반도에는 ‘6.25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마을에서는 좌익에게 포섭되어 부역한 사람들이 우익에게 끌려가서 비참하게 목숨을 빼앗기고, 하나의 가정에서 하나는 좌익으로 하나는 우익으로 갈라져서 상반되는 이념과 조직의 허수아비가 되어 미친 듯이 죄악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방식의 차이는 인정될지 모르지만 결과는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살육하는 것이었다.

 

어느 늙은 부부의 큰 아들은 우익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그 둘째아들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좌익(팔치산)이 되어 집을 떠나고 말았다. 늙은 부모와 어린 여동생은 살 수가 없게 되어 집을 버리고 정처 없이 유랑을 떠났다. 그들은 이웃도 모르게 한밤중을 이용하여 괴나리봇짐을 쌌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삶을 마감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숙자가 되고 굶고 병들고 추위에 얼어서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발적으로나 강제적으로 죽음의 벌판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주택과 도로와 교량과 학교와 공장과 병원이 파괴되고 병자와 불구자와 걸인들이 거리를 헤매는 비참한 풍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빚어진 참상은 유형무형으로 나타나고 놀라운 통계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 그치지 않고 온 세계가 분열하고 대립하고 총칼을 겨눈 세계적인 대전쟁이기도 하였다. UN군이라는 깃발 아래 전투요원을 파견하여 목숨을 바치고 의료지원을 아끼지 않은 많은 자유우방들의 깃발이 지금도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 자유와 평화와 정의는 인류공통의 이상이요 희망인 것이다.

 

총성과 포성과 폭음을 피하여 고향을 등지고 38선을 넘어 낯설고 물 설은 남한 땅으로 머나먼 피란길을 달려 온 북한의 동포들이 거리를 메우기도 하였고 “인류역사상 최대 비극의 행렬”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천만 이산가족이라는 말도 있다. 비극의 무대는 삼천리금수강산이요, 비극의 주인공은 단군자손이요, 배달민족이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도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정전협정을 위반한 심각한 사례는 그치지 않고 이어졌고 아직도 한반도에는 심각한 긴장과 불안이 감돌고 있다. 자유와 평등과 존엄은 어디로 갔는가. 핵무기와 유도탄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시는 무궁화동산에서,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배달겨레는 스스로 저지르는 동족상잔으로 자멸할 수는 없다. 오천년 역사의 죄인이 되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다시 6월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말한다. ‘6.25’를 상기하라고. 마음을 가다듬고 평화를 지키고 간직하라고.

 

(2022.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