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내 인생의 비겁들아, 영원히 안녕

송담(松潭) 2021. 6. 25. 15:46

내 인생의 비겁들아,

영원히 안녕

 

 

 

"네가 왜 방어를 못 했는지 알아?"

"실력이 부족해서요."

“그게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야. 겁을 먹으니까 펀치를 못 보는 거지”

 

박장호 시인은 7개월간 복싱이라는 치열한 육체적 수련 과정에 몰두한다. 「샌드백 치고 안녕」은 복싱을 통해 내면을 일깨우고 삶을 성찰한 과정을 섬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거친 숨소리와 땀 냄새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느 날 시인은 훈련 중에 스파링을 끝낸 한 중학생과 관장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는다. "겁을 먹으니까 펀치를 못 보는 거지." 시인은 관장님의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육체만 쇠락한 것이 아니었다. 시인은 내면도 쇠락해버린 자신을 본다. 나이 먹고는 이리저리 세상이나 재면서, 용기 대신 겁이나 잔뜩 집어먹고, 그렇게 해서 삶으로부터 날아오는 '편치' 에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던 자신의 비루한 모습을 그 순간 보게 된 것이다.

 

'멕시칸 복싱'은 뒷다리의 발꿈치를 들고 체중은 앞다리에 싣는 것이 기본자세란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것은 언제든 앞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자세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유지할 수 없는 자세’인 것이다.

 

대개 두려움이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눈에 보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두려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행동’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멕시칸 복싱의 저돌적인 기본자세를 삶에 장착하고 산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뭘 잘하려고 애를 쓰면 더 안 되고 꼬이기도 한다. 삶의 아이러니지만 화가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림이 잘 안 되는 경우의 대부분이 '잘하려고 할 때'다. 두려움은 결국 욕망이 본질을 앞설 때 만들어진다. 그렇게 화가의 손에 들려진 붓이 욕망의 도구가 되면, 사실 그 그림은 이미 끝장이다. 좋은 그림이란 욕심의 구현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적 몰두의 결과다.

 

미대를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유난히 그림이 되지 않는 날이었다. 결국 그림을 망치고 말았다. ‘에라이~’ 하는 마음으로 그리다 만 캔버스에 과감하게 낙서를 했다. 하필 그때 교수가 그 장면을 봤다. '오늘 혼 좀 나겠구나'하고 쭈뼛거리는데, 유심히 내 그림을 보던 교수는 놀랍게도 칭찬을 했다. 버릴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휘갈긴 낙서가 의외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샌드백 치고 안녕」을 쓴 박장호 시인의 복싱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확 휘갈겨 보는 마음' 말이다. 이리 재고 저리 생각하는 계산보다는 그렇게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 복싱의 고수든 예술의 고수든 그 지극한 경지가 필요하다.

 

< 멕시칸 복싱 > 2017, 천지수 작

 

 

나는 링 위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그렸다. 둘 중 하나는 나다. 하지만 상대편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이것은 ‘내면의 두려움’과의 시합일 수도 있다. 목탄으로 그리고 지우고, 물감을 칠했다가 또 지우기를 반복하며 그림을 최대한 망치려고 해 본다. 나는 캔버스 위에서 의도적으로 실패를 구현해 보고 싶었다. 용감함은 더 잃을 것이 없을 때 생긴다. 나는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용감해지고 싶었다. 그림 속 복싱하는 사람 뒤로 겹을 이루는 잔상들은 두려움에 맞서고 실패와 싸우면서도 끝내 다시 일어나 전진할 수 있는 인간을 표현한 것이다.

 

"너와 나,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것은 결국 난타전이야, 네가 얼마나 센 펀치를 날리느냐가 아니라 네가 끝없이 맞아 가면서도 조금씩 전진하며 하나씩 얻어 나가는 게 중요한 거야. 계속 전진하면서 말이야. 그게 바로 진정한 승리야. 몇 대 맞지 않으려고 남과 세상을 탓해선 안 돼."

 

완성한 그림을 앞에 두고 영화 <록키 발보아>에 나왔던 이 대사를 떠올렸다. 박장호 시인이 해낸 '안녕'을 이제 나도 해 본다.

 

"내 인생의 비겁들아. 영원히 안녕!"

 

 

< 2 >

 

발효할 것인가, 부패할 것인가?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평범한 이 문장이 그날따라 자꾸 입가에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온종일 홍얼거리고 있는 노래처럼. 「달을 보며 빵을 굽다」라는 책을 읽은 날이었다. 순전히 이 문장 때문이었다.

 

“달이 찰수록 발효가 빨라진다는 옛 조상들의 지혜를 떠올리니,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면서 그에 맞춰 일하는 삶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참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라고 중얼거렸다. 얼마나 한가한 인생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한편으론 얼마나 여유 없는 인생이면 나는 재미까지 질투 하나 싶기도 했다.

 

「달을 보며 빵을 굽다」를 쓴 쓰카모토 쿠미는 좀 특이한 제빵사다. 일본의 작은 도시 단바에서 달의 주기에 따라 빵을 굽고 여행을 한다. 그녀는 점포도 직원도 없는 빵집을 운영하며,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빵을 만들고 여행을 떠나는 패턴을 반복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에서 세 가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함께 빵을 만드는 생산자들과의 인연’, ‘자신이 일하고 머무는 도시 단바에 대한 애정’ 그리고 ‘빵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

 

달의 주기에 따라 빵을 굽는다고? 발상이 신선했다. 저자는 음력 초하룻날에서 보름을 지나 5일간 월령 0일에서 20일 사이에는 빵을 굽고, 보름달이 뜬 6일 후부터 다음 달 음력 초하룻날까지인 월령 21일에서 28일 사이에는 다음 빵을 만들기 위한 식재료를 찾는 여행을 한다. 달의 주기에 따라 발효 진행 속도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반죽숙성 시간에 차이를 두는 제빵 기술이다. 그녀가 독일 베를린 근교 작은 빵집에서 익힌 기술인데, 설명에 따르면 '하나의 사상적 개념을 제빵에 적용한 것'이라고 한다.

 

독일의 사상가 루돌프 슈타이너가 창안한 ‘바이오 다이내믹 농업’에서는 먹거리 생산시스템 자체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한다. 우리 인간 역시 생명체의 변화에 따라 생활하면서 근본적인 풍요로움을 만든다. 달의 주기에 삶의 주기를 맞추고, 제철에 나오는 가장 신선한 수확물만 사용해 빵을 만드는 방식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자신의 삶에 끌어들여 적용한 것이다.

 

저자의 신념대로 달의 주기와 발효가 밀접한 관계라면, 그 비밀이 무척 신비롭고 궁금했다. 마법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발효는 미생물이 에너지를 얻기 위해 유기물을 분해하는 과정이다. 달이 미생물의 발효 활동을 활발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는 것일까? 미생물, 그 작디작은 아이들도 보름달이 뜨면 늑대처럼 변해 울부짖는 것일까?

 

천문학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다들 달을 올려다보며 나처럼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이다. 산전수전 겪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의 인생이 훤씬 신나는 것처럼 그때 사람들은 훨씬 더 신나게 살았을 것만 같다. 달을 보고 사는 인생을 선택한 저자의 방식에 드디어 공감하기 시작했다.

 

발효와 부패는 사실상 같은 맥락이다. 환경에 따라 절묘하게,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큰일 나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자연이 던져주는 이 은유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내 인생은 발효할 것인가, 부패할 것인가?"

 

「달을 보며 빵을 굽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다. 평생이 질문 하나를 놓고 끝없이 묻고 대답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3 >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에 있게 됐을 때는 외로울수록 자연과 더 가까워지는 나 자신을 보았다. 아프리카의 자연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었다. 밤 바닷가를 걷다가 경이로운 장면을 보기도 했다. 시선을 올리면 밤하늘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했고, 이어 시선을 내리면 하얀 해파리 떼들이 발광하면서, 하늘과 경계가 완전히 없어진 검은 바다를 온통 채우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면 마치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과 환상에 구분이 없어지는 기이하고 특별한 경험이다.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가질 수 없는 기억들이다. 낯선 곳에 자신을 옮겨다 놓으면 스스로가 더 잘 보인다. 또 낯선 곳에서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아프리카 시절, 나 자신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한 인생을 사는 것도 여행이라면 내 지난 발자국들은 이 세상 어디에 남겨졌을까? 어떤 간절함으로 살아야 이 세상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것일까? 여행이란 떠올리기만 해도 이토록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오늘도 물감 묻은 붓을 노 저으며 캔버스라는 배를 타고 여행을 한다. 우주의 무인도를 가보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극한 고립’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에게 잠재돼 있던 지혜와 용기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최고 여행지가 될 수도 있겠다.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은 ‘천국의 고독’을 느꼈던 잔지바르 섬의 모습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절경과 맛난 음식이 있어도 홀로 섬에 계속 고립돼 있다면, 자발적 고립이 아닌 다음에야 천국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 따위는 없다. 지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다응 것만으로도, 나만의 행복한 발자국을 충분히 남기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를 이 세상을 여행하라고 보냈을 것이다.

 

천상병의 시 「귀천」이 떠오른다. 시인은 살아서 알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지수 / ‘책 읽는 아틀리에’(출판 : 천년의 상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