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행복의 의미

송담(松潭) 2018. 7. 13. 19:32

 

행복의 의미

 

 

  행복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전에 제시된 행복의 첫 번째 정의는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다. 이 정의는 우연()과 복()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행복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마음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 상태를 가져오는 조건들의 특성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행복이라는 단어는 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extraordinary) 일이 굳이 애쓰거나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일어나는 우연성을 말하고 있을 뿐, 행복이라는 주관적 경험 자제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힌트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幸福은 행복 경험 자체보다는 행복의 조건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가 우리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30개 국가의 사전을 분석하여 각 나라에서 행복이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를 고찰한 한 연구에 따르면, 30개 국가 중 총 24개 국가의 사전에서 행복은 운 좋게 찾아오는 사건이나 조건이라고 일차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두 번째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행복이란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 이 정의는 심리학자들이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이라고 부르는 행복에 대한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幸福이라는 단어는 유쾌함과 만족이라는 뜻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마음 상태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이름을 바꿔보면 어떨까?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행복 경험 자체의 본질을 더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이름이 없을까? 고전 연구자인 박재희 박사가 2012년에 쓴 한 칼럼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남의 시선과 기대에 연연하지 않고 내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삶의 자세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만족스럽다. 그 만족의 상태를 자겸(自謙)이라고 한다. ()은 만족스러운 것이다.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스러운 상태를 바로 쾌족(快足) 이라 한다.

 

 중국 송나라 시대 유학자 주희가 엮은 <대학장구(大學章句)>에 나오는 "성기의 무자기 차지위자겸 겸쾌족(誠基意 毋自炊 此之謂自謙 謙快足)'이라는 문장을 해석한 글인데, 여기 등장하는 쾌족(快足)’기분이 상쾌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심리상태를 지칭한다.

 

 

 행복에는 행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 행복한 감정을 측정할 때에는 PANAS(positive and negative affect schedule)라는 도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PANAS는 일정 기간 동안 한 개인이 경험한 긍정 감정과 부정 감정의 정도를 측정하는 도구다. 여기에 포함된 긍정 감정 열 가지 와 부정 감정 열 가지 는 다음과 같다.

 

 <PANAS 감정 목록>

 

 (긍정 감정)

 

 관심 있는, 신나는, 강인한, 열정적인, 자랑스러운, 정신이 맑게 깨어 있는. 영감 받은, 단호한. 집중하는, 활기찬

 

 (부정 감정)

 

 괴로운, 화난, 죄책감드는, 겁에 질린, 적대적인, 짜증난, 부끄러운, 두려운, 조바심 나는, 불안한

 

 

 관심있는(Interested)

 

 PANAS는 우리의 행복을 측정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묻는다, 인간에게 가장 행복한 상태중 하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상태다. 특별히 그 대상이 사람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프로이트가 일찍이 말했듯이, 행복해 지고 싶다면 사랑에 빠지는 것이 좋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한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기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 등장했던 대사 내 안에 너 있다야말로 행복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행복이란 내 안에 무언가가 있는 상태다. 행복한 삶이란 가슴에 관심 있는 것 하나쯤 담고 사는 삶이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는 관심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나는 무언가에 관심이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주는 중압감과 애매함에 비추어볼 때 나에게 관심 있는 대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이며 명확하다.

 

 

 영감 받은(inspired)

 

 행복한 상태에 대한 우리의 상상에 잘 등장하지 않는 또 하나의 긍정 정서는 영감이다. 영감이란 보통의 인간에게서는 쉽게 기대되지 않는 성취나 행동을 목격했을 때 우러나는 고취의 감정이다. 영감의 사전적 정의는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이다. 때로는 소름이 돋기도 하고,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수반한다. 위대한 연설, 영혼을 울리는 음악, 의식을 쪼개는 도끼 같은 문장,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용서, 불굴의 투지처럼 일상성을 뛰어넘는 탁월함과 도덕성 앞에서 우리의 영혼은 고취되고 의식은 확장된다.

 

 이런 영감의 상태가 행복의 또 다른 요소다. 그러나 불행히도 幸福이라는 한자에는 영감이 행복의 원천이 된다는 그 어떤 힌트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 결과, 우리는 영감과 행복을 별개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행복이라는 또 다른 정서를 누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감사(gratitude)

 경외감(awe)

 

 영감과 사촌 관계에 있는 정서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감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외감이다. 영감, 감사, 경외감 이 세 가지는 자기만의 경계를 벗어나게 하는 초월적 감정들이다. 영감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탁월함을 경험하고, 감사를 통해 자기와 연결된 타인들과 자연 그리고 신을 인식하게 되며, 경외감을 통해 자기보다 더 거대한 존재들을 느끼게 된다.

 

 이 감정들은 우리 안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영원한 것에 눈을 뜨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감정이라고 불린다. 그 누구도 이 도덕적 감정들을 피상적이고 천박하다고 폄하하지 않는다. “저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대자연이 주는 경외감을 느끼고 싶어요라는 말에 감동을 받는다면, 당신은 여전히 행복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행복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 없어야 행복이라는 오해

 

 행복, 즉 쾌족의 상태는 고통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행복한 감정() 상태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긍정적인 감정들의 상대적인 비율로 측정된다. 부정적인 감정 경험보다 긍정적인 감정 경험이 더 많을 때를 행복한 상태라고 이야기할 뿐이지 부정적인 감정 경험이 전혀 없어야만 행복하다고 결코 정의하지 않는다.

   

 ‘고통에도 뜻이 있다는 말처럼,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 빠른 속도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공포라는 감정을 즉각적으로 느껴야 한. 중요한 목표가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를 받는 상황에서는 분노라는 감정을 경험해야만 즉각적으로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고통을 경험해야 할 상황에서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더 나아가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행복이 고통의 완벽한 부재 상태일 것이라는 생각은 완벽하게 틀린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완벽한 결혼생활이란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행복의 우연성을 허하라

 

 앞서 우리는 행복(幸福)이라는 단어가 행복의 조건만을 가리킬 뿐 행복의 본질에 대해서는 눈감는다는 점을 살펴봤다. 그렇지만 이 한자어가 마냥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현대사회가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사건들의 중요한 특성 하나를 점점 간과하게 되었다. 바로 행복의 우연성이다. 행복이 설계되고 기획되고 추구되어야 할 대상이 되면서 우연한 행복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쾌족(快足)을 경험하기에 ()이라는 우연성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행복은 본질 자체가 자유로움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느슨해야 한다. 오직 이 방법만이 행복에 이르게 한다면서 하나의 길만을 제시하거나, 행복은 선택이 아니라 삶의 의무라고 행복을 종용하는 것은 행복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행복, 우연한 행복, 심각하지 않은 행복이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김사인의 시 조용한 일은 우연히 발견한 행복을 실감케 한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우연히 발견한 소소한 행복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만큼 적절한 것이 있을까.

 

 행복은 비장한 전투에서 얻어내는 승리가 아니다. 행복은 우리 삶에 우연히 찾아와준 것들에 대한 발견이다. 幸福이라는 한자어가 주는 깊은 교훈이다. 행복의 본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쾌족이라는 한자어가 더 낫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행복의 우연성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다. 정복의 대상, 추구의 대상, 그리고 설계의 대상이 되어버린 행복이 우리에게 주는 중압감을 이겨내기에 ()’이라는 글자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내게 일어나는 우연을 내가 설계할 수는 없지만, 타인에게 일어나는 우연은 내가 설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겨울옷을 꺼낼 때 우연히 공돈을 발견하는 기쁨을 위해 식구들의 옷에 의도적으로 지폐 한 장을 넣어두는 것(자기 옷에 의도적으로 넣어두는 것도 멋진 일이다. 왜냐하면 돈을 넣어둔 사실을 망각할 것이 분명 하니까), 기념일도 아니고 명절도 아닌데 뜬금없이 누군가에게 선물권을 보내는 것, 톨게이트에서 전혀 모르는 뒷사람을 위해 돈을 내주는 것. 이처럼 누군가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우연을 선물한다는 의미다.

 

 행복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처럼 가벼우면서 대가의 작품에서 경험하는 영감과 경외감처럼 깊이가 있다. 행복은 고통의 완벽한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성장하려는 자세다. 무엇보다 행복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단 하나의 감정이 아니다. 삶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가슴이 설렌다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백사장에 하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매일 아침 지구촌 어디에선가 반드시 이런 대화가 오간다.

 엄마: 이불 개라.

 아들: 저녁에 또 펄 건데 꼭 개야 해?

 엄마: 그래도 개!

 

 기껏 애써 봐야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애초부터 굳이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아들과 그래도 이불을 개야 한다는 엄마 둘 중 누가 옳은가? 유사한 논쟁이 행복 연구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행복과 유전의 관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1971년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Philip Brickman)과 도널드 캠벨(Donald T. Campbell)'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는 용어를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쾌락의 쳇바퀴란 어떤 경험으로 유발된 정서적 상태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적응(adaptation) 현상을 지칭한다. 운동 기구인 트레드밀 위에서 아무리 달려봐야 결국 제자리인 것에 빗대서 만들어낸 용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아래와 같은 고백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표현한 적이 있다.

 

 욕망이라는 것은 쉼을 모른다. 욕망 자체가 무한하며 끝이 없어서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자방아를 돌리는 말과 같다.

 

 고대부터 이런 생각이 존재했던 이유는 그만큼 적응 현상이 인간의 생존과 건강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리 활동은 일시 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항상성, homeostasis)을 가지고 있다. 가령 우리의 체온은 일시적인 변동이 있을지언정 결국 36.5도로 돌아온다. 우리의 심박도 일시적으로 빨라질 수는 있어도 빠른 시간 안에 제자리로 돌아온다. 만일 이런 항상성이 작동되지 않아 우리의 생리 활동이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도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슬픈 사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우울을 경험하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감정 상태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기쁜 사건으로 인해 경험하는 강렬한 희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약해진다. 이 역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항상성의 작동 결과다. 희열의 상태가 너무 장기간 지속되면 일상적인 생활을 해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이성 간의 열정적 사랑도 그 유효기간은 짧으면 3, 길어야 7년 정도에 불과하다. 격정적인 사랑이 지나치게 오래 유지되면 자녀 양육을 포함한 일상의 일들을 안정적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 그 자체는 놀랄 일도 아니고 실망스러운 일도 아니다.

 

 유전이 행복을 결정한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고 국가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개인의 행복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행복한 사건을 경험한 후에 일시적으로 행복감이 상승하거나 불행한 사건 이후에 행복감이 하락하더라도, 결국은 그 사람의 정해진 행복 수준(set point)으로 돌아온다는 주장은 일련의 연구를 통해서지지 받아왔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는 결코 놀라운 현상이 아니며, 실망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열정적인 사랑이 결국에는 식는다고 해서 그런 사랑을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몸의 비정상적 상태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방치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듯, 행복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에 불행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려는 노력은 소용없다는 주장은 이상한 생각이다. 행복이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우선,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일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하락한 행복감이 원래 수준으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주 길다면,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니라도 효용성 면에서는 의미가 없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분석이 미국 미시간 주의 리처드 루카스(Richard Lucas) 교수 연구팀에 의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삶의 중요한 사건들 중에서도 사별, 장기 실업, 중증 장애를 경험한 사람들의 행복감은 심각하게 낮아진다. 이들의 행복감이 제 수준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약 9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 후로도 회복되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런데 최소9년이라는 시간은 행복이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주장을 궁색하게 만들 정도로 매우 긴 시간이 아닌가?

 

 두 번째로 생각해볼 사항 역시 시간과 관련 있다. 파도에 지워질 것이 분명함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백사장에 표시하는 연인들을 무모하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결국 사라질지언정 그 순간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경험한 행복한 시간들은 아무리 짧더라도 그 자체로 소중하다. 같은 원리로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받은 고통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결국 회복될 고통이라고 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행복의 측면에서든 고통의 측면에서든 결국 원래의 감정 상태로 돌아갈 것이기에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냉소적인 태도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 모르는 인간 실존의 한계를 감안하면, 우리 삶은 매 순간이 소중하다. 결국 제자리 돌아갈 것이라는 이유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무시하는 것은 삶에 대한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삶은 언제나 지금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돈으로 시간을 산다

 

 모두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바쁘시죠?"라는 말이 습관적 인사가 되었고, “시간이 없다"는 말은 게으름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변명이 되었다.

 

 시간은 본질상 유한한 자원이기 때문에, 돈을 버는 데 쓰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다른 활동을 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활동에는 여행, 운동, 수다, 걷기, 먹기, 명상 등이 포함된다. 우리가 비록 과거에 비해 훨씬 부유해졌을지는 몰라도 행복을 가져오는 이런 활동에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돈과 시간 둘 다 한정된 자원이며, 많은 경우 서로 경쟁관계 놓이게 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직항편 비행기표를 사는 것은 경유하는 비행기 표를 사는 것보다 돈이 많이 든다. 많은 보수를 주는 직업을 택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야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돈을 택하면 시간에서 손해가 발생하고, 시간을 택하면 돈에서 손해가 발생하는 갈등적 상황이 흔하게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을 선택할 것인가, 돈을 선택할 것인가? 행복한 사람들은 어느 쪽을 택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UCLA 연구팀이 일련의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돈과 시간 중 무엇을 더 원하는지를 물었다. 또한 이들의 행복감도 측정했다. 분석 결과,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시간보다는 돈을 더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을 선택한 사람들이 돈을 선택한 사람들보다 행복감이 높게 나타났다!

 

 지금껏 우리는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라는 가르침에 따라 시간을 아껴가며 돈을 버는 데 주력했다. 이제는 돈이 시간이다(Money is time)’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돈으로 시간을 사는 데 주력해야 한다. 알고 보니 행복한 사람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발견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원칙적으로 국가 순위를 발표하지 않기 때문에 올림픽 국가 순위 집계 방식은 국가별로 다르다. 미국(특히 미국 NBC 방송)은 메달의 색깔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메달의 수를 종합하여 국가 순위를 매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는 금메달 개수로 순위를 정한다. 금메달 개수가 같을 때만 은메달, 그 다음에 동메달 수를 따진다.

 

 미국식 집계 방법에 따르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미국이 총 110개의 메달로 1 , 중국이 100개로 2위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중국의 방법에 따르면 중국이 금메달 51개로 1, 미국이 36개로 2위다. 우리나라의 순위도 어떤 방법을 따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의 집계 방법에 따르면 우리는 금메달 열세 개로 7위지만, 미국식 집계에 따르면 우리 보다 금메달이 여덟 개나 적은 프랑스가 총 메달 40개로 31개인 우리를 제치고 6위가 된다.

 

올림픽 국가 순위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행복은 긍정 정서 대 부정 정서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달려 있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versus Negative Affect)라는 논문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한 자극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 자극에 적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행복 혹은 불행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물론 실업, 이혼, 장애와 같은 사건들은 예외다) 따라서 어쩌다 한 번 강한 자극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 행복에 유리하다.

 

 만일 이 행복 원리가 사실이라면, 행복한 사람들은 금메달 수보다 총 메달 수를 중시하는 집계방법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을 음미하기(savoring)’라고 한다. 음미하기란 소소한 현재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마음의 습관을 의미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랑게르한스 섬의 오후 ランゲルハンス午後>가 유명해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인용되기 시작한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는 이 음미하기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 소소하게 음미할 것들은 이처럼 우리 일상 곳곳에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소소한 즐거움들을 더 자주 경험하려고 일상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이전부터 이미 소확행의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최인철 / ‘굿 라이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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