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오페라란 무엇인가?

송담(松潭) 2018. 6. 30. 17:07

 

오페라란 무엇인가?

 

 

오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진 출처 : 경남오페라단 리골레토(2010)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시대를 지나 20세기까지 클래식 음악은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 기술의 발달로 라디오와 레코드 같은 매체가 등장하면서 클래식은 비로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되었지요. 덕분에 클래식을 즐기는 인구는 그 전보다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클래식은 여전히 특정한 사람들이 듣는 고급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지요.

 

 19세기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뮤지컬처럼 대중적 성격이 강한 음악극이던 오페라는 오늘날 어째서 많은 사람이 큰 부담감을 느끼는 장르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크게 세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지요.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오페라가 너무 화려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오페라 무대에서 펼쳐지는 휘황찬란한 무대미술과 의상은 어쩐지 상류층의 전유물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일반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르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둘째 이유로는 오페라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오페라의 대사들은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인 경우가 대부분 이지요. 오페라를 본다 한들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셋째 이유로는 성악가들의 과장된 창법을 들 수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울리는 듯한, 공명감이 큰 오페라 창법은 대중음악에 익숙한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나 <캣츠> 같은 대중음악적 창법의 뮤지컬을 오페라보다 더 친근하게 느끼기 쉽지요. 실제로 오페라에서 파생되어 20세기에 태어난 장르인 뮤지컬은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오페라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등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여 표현합니다.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적나라하게 끄집어내어 보여주지요. 그런 극적인 표현이 가능한 것은 오페라가 노래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좋은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오페라는 라틴어로서 작품이라는 뜻을 지닌 ‘Opus’의 복수형입니다. ‘작품들이라는 뜻 그대로 오페라는 여러 음악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이지요, 더 넓게는 이 단어를 음악 미술 연극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페라는 종합예술을 지향하는 무대극이니까요. 하지만 오페라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요소는 어디까지나 음악입니다. 오페라 창작의 중심은 작곡가이지요. 나머지 요소는 작곡가의 의도에 맞추어집니다. 대본 역시 마찬가지지요.

 

 

 교회 밖으로 나온 음악

 

 오페라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르네상스란 고대 그리스의 인문주의를 부활시킨 운동으로서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지요. 유럽인들은 중세의 오랜 암흑기를 거치며 종교에 회의를 느꼈고, 점차 이성理性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관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회화·조각·건축 등 미술 분야의 찬란한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일군의 천재가 이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눈부신 활약을 했지요. 그렇지만 음악은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음악은 문학이나 미술 등의 문화예술 분야보다 언제나 뒤처져서 발전해왔지요. 사실 오페라가 탄생하기 전까지 음악은 매우 단조로웠습니다. 서양음악사를 살펴보면 그레고리오 성가 이후 오랫동안 단선율의 음악만이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음악을 억제해온 탓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단조롭고 절제된 음악을 장려하고 화려한 음악을 금지했습니다. 기악음악소차 세속적으로 여겨 무반주의 성가만이 예배당에 메아리치던 때도 있었지요.

 

 교회가 유럽을 지배했던 수백 년 동안 음악의 세계에서 군림한 것은 모노포니였습니다. 모노포니란 단성음악 즉 단선율의 음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의 선율만으로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것을 말하지요. 최초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음을 동시에 노래하게 된 시기는 9세기 말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두 개 이 상의 화음을 사용하는 폴리포니(다성 음악)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300여 년이 지난 12세기 말에 이르러서입니다. 단조로웠던 교회음악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입니다.

 

 오페라의 탄생과 발전

 

 르네상스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풍요로워진 음악은 이제 교회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신에 대한 찬양이 아닌 인간의 사랑을 노래한 마드리갈같은 세속 음악이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면서 음악은 더 화려해졌고, 마침내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게 되지요.

 

 1537년의 일입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부유한 금융가였던 바르디 백작의 저택에 몇몇 예술가와 귀족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카메라타(작은방)’라는 모임을 만들어, 음악과 연극과 춤이 어우러지는 고대 그리스의 극을 되살리고자 연구를 거듭했지요. 그 결과 오페라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야코포 폐리 작곡의 <다프네>가 탄생합니다. 이 최초의 오페라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 악보가 전해지지 않아 아쉽게도 그 내용을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독창에 간단한 반주를 곁들인 단출한 음악극이었으리라 추측할 뿐이지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1607년에 작곡한 <오르페오>는 오페라다운 면모를 비로소 갖추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페라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최초의 오페라로 평가됩니다. 악보가 전해질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는 이 오페라는 예술 후원으로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결혼식 축하연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을 넘나드는 <오르페오>의 강렬하고 극적인 감정 표현은 이후 오페라의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습니다.

 

 오르페의가 성공을 거두자 오페라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 새로운 장르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큰 인기를 누렸지요.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창작돼 무대에 올라간 오페라의 수만 해도 무려 1,000여 편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세속음악의 대표 장르였던 오페라는 이러한 경쟁 속에서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부단히 진화해나갔습니다.

 

 처음에는 궁정 안에서나 귀족을 위해 공연되었던 오페라는 어느덧 평민들도 즐기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오페라를 누구나 관람할 수 있게 되면서 오페라만을 공연하는 전용극장이 여러 도시에 세워졌지요. 오페라의 인기는 폭발적이어서 극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습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극장마다 찾아다니며 오페라를 보는 마니아들도 생겨났지요.

 

 진정한 음악극으로 진화하다

 

 초기의 오페라, 즉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는 주로 신화나 역사 이야기를 각색하여 작곡한 것이었습니다. 사랑과 증오, 기쁨과 고통, 삶과 죽음 등을 대비하며 신화와 역사 속의 영웅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했지요. 그렇다 보니 극이 진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의 오페라를 "오페라 세리아라 부릅니다. 세리아serla는 영어로는 'serious'이지요. 즉 오페라 세리아란 진지한 오페라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정가극正歌劇이되지요.

 

 오페라는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만족감을 느꼈던 왕족과 귀족의 입맛에 맞춰 오페라가 제작되었던 것이지요. 르네상스의 인문 정신 속에서 꽃피었던 오페라는 본래의 모습을 잃고 점차 귀족의 오락물로 전락해갔습니다. 오페라는 군주의 생일, 결혼 축하연, 전쟁 승전일 축제 등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습니다. 아낌없이 돈을 들여 화려하게 꾸민 오페라는 의상과 무대장치 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화려함을 추구하다 보니 음악 역시 기교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이 때문에 거세한 남성가수인 카스트라토가 스타로 부상하기도 했지요. 결국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오페라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1750년대에는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개혁 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은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입니다. 그 자신이 작곡가이기도 했던 루소는 독일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l714-87를 오페라의 새로운 길을 제시할 작곡가로 생각했습니다.

 

 글루크는 1762년에 초연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를 통해 새로운 오페라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 오페라를 통해 극의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했습니다. 이를테면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장식음을 절제함으로써 연기에 집중하도록 했고, 극의 내용과 아무런 상관 없는 음악과 무용은 철저히 배제했지요. 음악은 극의 스토리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연스러움과 격조 있는 단순성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대본과 음악이 서로 어우러져 생동감 넘치는 감동적인 오페라가 되었습니다. 아리아와 중창은 더욱 유려해졌고, 비중이 높아진 합창은 극의 진행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레치타티보도 쳄발로(피아노의 전신인 건반악기) 대신 오케스트라로 반주함으로써 풍요로워졌고 극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효과를 냈습니다.

 

 오페라의 이정표, 모차르트

 

 글루크의 개혁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91에게로 이어졌고, 오페라는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교향곡을 비롯한 그의 기악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서양 고전음악의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아니, 그의 위대한 음악적 성과는 기악곡보다 오페라에서 더 눈부시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어떤 음악학자들은 오페라의 역사를 모차르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지요.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즐겨 감상하는 오페라는 모차르트 이후의 것이 대부분입니다, 모차르트는 글루크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아 천재적인 음악역량을 발휘했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에 독일 음악의 특색을 가미한 그의 오페라는 섬세한 관현악 기법, 지고지순한 아리아 복잡미묘한 중창 등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적 완성도를 성취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 <마술피리> 등 모차르트가 남긴 스물두 편의 오페라는 불멸의 명작이 되었지요.

 

 모차르트가 오페라에서 성취한 것은 음악적인 것만이 아니였습니다. 자유인을 꿈꾸었으며 진보적 성향이 강했던 모차르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시민계급이 꿈꾸는 사회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신분사회를 극복하려는 생생한 개성과 매력을 지닌 등장인물들을 보며 오랜 세월 사람틀은 위로받고 때론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낭만파의 트로이카 로시니 · 도니체티 · 벨리니

 

 오페라는 19세기 초에 이르러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모차르트가 보여준 오페라의 이상이 그가 죽은 후 이탈리아에서 결실을 맺게 된것이지요. 모차르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조아키노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1792-1868는 이탈리아 근대 오페라의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로시니는 고전파의 엄격한 소나타 형식을 오페라에 적용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인 특유의 타고난 선율 감각으로 벨칸토 창법을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켰습니다. 이탈리아의 전통 오페라를 꽃피운 것이지요. 특히 희극오페라인 '오페라 부파'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그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비롯해 <신데렐라> 기욤 텔> 40여 편의 오페라를 남겨 당대의 오페라 계를 휩쓸었지요. 로시니의 뒤를 도니제티와 벨리니가 계승하면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립니다.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사랑의 묘약>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지요. <사랑의 묘약>중의 유명한 아리아 남 몰래 흘리는 눈물에서 보여주듯이 도니체티는 감미로운 선율을 창작하는데 뛰어났습니다. 벨리니Bellini, 1801-35 역시 도니체티 못지않은 아름다운 메로디의 창조자였습니다, 벨리니는 노래에서 장식적 기교를 절제하고 목소리 자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여기에 깊이 있는 감정을 더하여 관객을 감동시키고자 했지요. <몽유병 여인> <청교도〉<노르마> 같은 걸작을 남긴 그는 안타깝게도 34세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등 낭만파 삼총사가 꽃피운 이탈리아 오페라는 베르디와 푸치니로 이어지면서 더욱 만개하게 됩니다.

 

 오페라의 거인들, 베르디 vs 바그너

 

 마침내 이탈리아 오페라는 위대한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1813~1901 를 맞이합니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 인기 있는 대표작을 비롯해 수많은 기념비적 오페라를 남긴 베르디는 선배 작곡가들처럼 선율을 만들어내는 데 타고난 재능을 지닌 천생 이탈라아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발성 자체에 역점을 두었던 선배들과는 달리 베르디는 극적인 요소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오페라를 본연의 것, 즉 극적인 것으로 되돌려놓은 것입니다.

 

 베르디는 사랑과 배신, 명예, 탐욕, 죽음 등 인간의 본질적이고도 보편적인 요소들을 오페라에서 진지하게 다루었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을 그린 <라 트라비아타>부터 장대한 돈 카를로스>에 이기까지 그 주제가 매우 다양하고 폭이 넓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베르디가 맹활약을 하는 동안 독일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83가 풍운아처럼 등장해 오페라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페라에 악극Musikdrania’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북유럽의 전통 설화, 거대한 규모의 관현악 무거운 음향 강력해진 성악으로 무장한 바그너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필적할 만한 독일적 오페라들을 야심차게 선보였습니다. 그는 관현악을 무척 중요시해, 오케스트라가 극을 이끌어가도록 했지요. 오페라를 교향곡처럼 다루었다고 할까요. 기존의 오페라가 아리아를 중시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습니다.

 

 바그너와 베르디가 유럽 오페라 계를 양분한 가운데 프랑스에서는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 1838-75라는 대단히 독창적인 작곡가가 등장합니다. 37세의 나이로 요절한 비제는 죽기 직전에 카르멘>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작곡했습니다.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이국적인 강렬함을 표현한 이 보석 같은 오페라 한 편으로 비제는 오페라 역사에 길이 남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최후의 낭만주의자 푸치니, 그리고 20세기의 오페라들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 위에 20세기의 신음악을 도입하여 독자적인 오페라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베르디처럼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오페라 소재로 가져와 라 보엠을 비롯해토스카> 나비부인> 등에서 불행한 여주인공의 운명을 그려냈지요. 푸치니의 매혹적인 선율과 멜로드라마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마지막 페이지를 찬란하게 장식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투란도트> 는 낭만주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동시에 오페라 황금시대의 종언을 선언한 작품이었지요.

 

 서양음악은 오페라가 탄생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기악음악이 꽃피게 된 것도 오페라 덕분이지요. 18세기에 나타난 기악음악의 결정체인 교향곡도 오페라에서 파생되어 독립한 장르입니다. 오페라의 서곡이 독립적인 거대한 기악음악으로 발전한 것이지요. 이처럼 오페라는 종합예술로서 웅장함과 화려함을 지녔을 뿐 아니라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것이 오페라를 서양음악의 꽃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금난새의 오페라 여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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