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연민 없이 사랑하라

송담(松潭) 2017. 7. 25. 05:02

 

 

연민 없이 사랑하라

 

 

 

 자비도 사랑도 동정이나 연민으로 쉽게 오인된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자비의 마음을 드러내는 감정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나를 넘어선’, 사랑 혹은 윤리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가령 프랑스 철학자 레비 나스는 고통받는 얼굴을 하고 있는 타인들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누군가 옆에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대개는 그 고통에 연민을 느끼며 그 것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기에, 내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근본적으로는 알 수 없는 타인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기존의 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내 생각에 타인의 고통을 갖다 맞추는 것은 타인에 가하는 또 한 번의 폭력이다. 이처럼 내가 알 수 없는 타인의 고통, 그 타자성을 향해 를 넘어 서는(초월) 것이 바로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자비는 물론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을 포함한다. 니체는 동정이나 연민을 비판하지만,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을 듣고 달려가는 연민이 필요한 사람이 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님은 분명하다.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웃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도 자비행의 중요한 일부다. 하지만 이와 다른 근본적인 차원의 자비가 있는 것 같다. 무아와 훨씬 더 가까이 잇닿아 있는 자비의 개념이.

 

 그것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등의 인식에서 나온다. 예전에 중국에선 인간 아닌 것이 불성이 있는지, 생명이 없는 것이 불성이 있는지를 둘러싼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같다. 그 불성을 참나(眞我)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불성이란 연기적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존재자로 현행화될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이해한다면, 굳이 생명체로 국한하지 않아도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말 역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부처에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으랴! 자비의 평등심은 부처 간의 평등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서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내가 마땅히 행할 바이다. 즉 자비란 스스로가 부처로서, 자신과 만나는 모든 잠재적 부처들에 대해 갖는 마음이고, 그들에 대해 행하는 바다. 그렇다면 자비란 잠재적 모든 중생과 또한 잠재적 부처로서의 내가 맺는 존재론적 차원의 우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부처로 현행화되지 못한 모든 중생이 기쁨을 얻고자 함에 응하여 기쁨을 주려하고, 고통이나 슬픔을 덜고자 함에 응하여 슬픔을 덜어주려는 잠재적 부처의 사랑이 자비행이다.

 

 모든 중생이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지만, 현행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조건에 따라 다른 지위와 규정을 갖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현행화된 세간에서는 조건에 따라 많고 적음,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교차하며 자비행이 행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상이한 차원의 자비를 구별한다.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와 법연자비(法緣慈悲), 무연자비(無緣慈悲)가 그것이다.

 

 ‘중생연자비는 고통스러워하는 중생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서 행하는 자비다. 이는 고통과 번뇌를 통해 행해지는 것이니, 번뇌를 끊지 못한 중생이 행하는 자비이다. 즉 중생이 다른 중생과의 관계 속에서 행하는 자비다 동정이나 연민은 이런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가며, 고통과 연민 없이 기쁨을 주는 것도 여기에 들어간다.

 

 ‘법연자비는 일체제법을 깨닫고 행하는 자비다. 자연의 법칙이니 세간에서 작동하는 마음의 법칙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자비행이다. 자신과 가까운 이웃이나 멀리 떨어진 이웃 모두에게 평등심을 갖고 대하려 하고, 생각이나 감각이 자신과 가깝든 멀든 남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기쁨의 증가와 슬픔의 감소를 추구하는 자비행이 여기에 들어간다.

 

 ‘대자대비라고도 불리는 무연자비는 온갖 차별된 견해를 여윈 절대평등의 경지에서 제법의 진여실상(眞如實相)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자비다. 현행화된 연, 즉 연기적 조건을 거슬러 올라가(無緣), 모든 중생이 잠재적 부처라는 점에서 절대평등함을 깨달은 사람이 행하는 절대적 자비행이다. 모든 중생이 부처임을 알고 그들과 부처로서 만나고 응대하며, 부처 간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이진경 / ‘불교를 철학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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