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커뮤니티 지수

송담(松潭) 2015. 6. 28. 17:12

 

 

커뮤니티 지수

 

 

 ‘커뮤니티 지수라는 게 있다. 사회나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주고받는 것을 일컫는 사회학 용어다. 이 지수가 높은 나라 혹은 공동체가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면,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보다 상부상조를 중시하는 한국사회가 커뮤니티 지수가 높지 않을까? 그러니 한국 사람이 의당 미국보다 행복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호프슈테드(hofsted)라는 문화연구가에 의하면, 한국은 18점이고 미국은 무려 91점이란다.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게 이 커뮤니티 지수인데, 우리나라는 OECD 36개 국가 중에서 35위다. 우리가 그만큼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는 말이다.

 

 

 

계량 불가능의 공간

 

 

 현대의 산업주의가 붕괴를 하면서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던과 같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이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런 이론을 주장한 학자들은 가타리(F. Guatari)와 들뢰즈(G.Deleuze)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계량 가능한 공간계량 불가능의 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산업문명이란 이 계량 가능한 공간을 정복하고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오는 세기는 계량 불가능의 공간에서 벌어진다는 거다. 이를테면, 지적도에 등록하여 소유할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기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분할하고 계측할 수 없는 그런 매끄러운 균질 속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그렇다. 우리가 시원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하늘이 바로 그곳이고, ’그것이다.

 

 우리나라 백두산 높이의 두 배나 되는 산을 닷새 동안 오르는 동안,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앞으로 몇 미터라는 이정표를 보지 못했다. 이 말은 어디까지 몇 미터, 어디까지 몇 킬로미터 하는 길이의 단위가 없다는 뜻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은 길이가 아니라 높이였다. 어느 동네까지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여기는 해발 몇 미터, 저기는 해발 몇 미터 하는 식이다. 거기엔 길이나 넓이나 부피처럼 계량 가능한 삶이 아니라, 하늘을 상징하는 높이의 계량불가능한 공간이었다. 이미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이 생성된 세계였던 것이다

 

 

 

 

표백세대

 

 

 ‘표백세대라는 말은 장강명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그에 의하면 표백세대는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의심이나 의문을 통해 창조성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살아봤자 기존의 지배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표백사상은 오로지 싼 노동력만 찾고 있는 이 완전한 세상에서 남보다 빨리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기 위한 표백의 과정만을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래서 표백세대는 아무런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흔이들 생각하는 대로 삶의 막장에서 어쩔 수 없이하는 게 자살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한 세상에 극단의 저항으로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당신 아들이 혹시 표백세대가 아니오?”라고 하거나, “이 세대가 바로 표백세대요라고 말이다.

 

 

 

휴대폰과의 작별

 

 

 엊그제 서울을 가다가 공중화장실에 들렀다. 마침 편안히 앉아야 하는 사태가 생겨서 좌변기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내 옆에서 휴대폰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더니 동시에 세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똥을 싸면서, 전화기에 대고 밥 먹었냐고 물으면서, 가관이 따로 없었다. 나오던 똥이 도로 들어갈 지경이었다.

 

옛날에 노크라는 게 있었다. 서양식 예절이라고 하지만 자못 노골적인 방식이다. 우리네 헛기침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그건 에둘러하는 암시였다. 그래도 노크헛기침은 오늘날 휴대폰에 대면 에헴이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 따르면 0~5세 영유아 중에서 26.4퍼센트가 3세에, 23.6퍼센트가 1세에 처음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한다. 3세가 되기 전인 평균 2.27세에 이미 스마트폰 버릇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버릇이라는 게 결국 이거다. 똥을 싸는 중에 전화기에 대고 말하고, 웃고, 화내고, 밥 이야기 하는 거 말이다.

 

 내 나이 세 살 때는 시골에 살면서 봄날 개구리가 알 낳는 걸 보노라 물 속 어미 개구리를 한나절 동안 엎드려 보는 버릇 밖에 없었다. 이게 본시 내 세 살 때 터득한 우주만물과의 소통법이다. 이제 나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휴대폰하고 작별하려고 한다. 새해부터는 일절 휴대전화를 내 몸에 소지하고 다니지 않을 거다. 아예 싹 치워버릴까 했지만, 그동안의 습성이 고약해서 그렇게는 못하고 집에다 처박아두고 저녁에만 한 번 삐끔 볼 작정이다.

 

 

 

구토와 배설의 도시

 

 

 여행은 풍경이다. 풍경은 때때로 숭고함을 갖기도 하지만 낙망인 경우도 있다. 자연이 종교와 시를 잉태한다면, 도시는 경멸과 구토를 배설하기도 하니까. 카트만두라는 도시의 풍경은, 숭고와 경외가 아니라 배설과 구토 위에 돋아난 버섯과 같았다. 사람과 짐승과 온갖 쓰레기들은 도시를 이루는 종균(種菌)과도 같았다. 종균의 배양토와도 같은 도시를 자동차는 좀체 헤치고 나가지 못했다. 마치 미드박테리아(미드콘드리아나이트로백터테트라이지인플루엔스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숨을 헐떡이는 해면체를 밟는 느낌이었다.

 

허태수 / ‘내 생각에 답한다중에서

* 위글 제목 일부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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