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시대의 성과 몸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생물학적 몸 차이에 의해 생물학적 남자(male)는 남성(man)이라고, 생물학적 여자(female)는 여성(woman)이라고 한다, 남녀를 이렇게 몸 차이에 따라 구분하는 것을 생물학적 성 또는 ‘섹스(sex)’라 부른다. 남자와 여자는 섹스 차이가 있으며, 이 차이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고정불변의 것으로 간주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그런데 간혹 성장과정의 아이에게 “너는 아들인데 하는 짓은 딸 같아! ” “너는 딸인데 하는 짓은 아들 같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딸 같아’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아들인데 성격, 심리, 행동 등이 생물학적으로 딸인 사람이 지니는 특징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성과 구분되는 심리적, 정신적 특징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신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정신 차이를 구분하여 남자 같은 성격은 ‘남성적 특징’ 또는 ‘남성성’으로, 여자 같은 성격은 ‘여성적 특징’ 또는 ‘여성성’으로 개념화된다. 남성성의 예로는 강인함, 독립심, 자립심, 책임감, 주체성, 능동성, 공격성 등이 있고, 여성성은 부드러움, 연약함, 의존성, 관계성, 수동성, 방어성, 배려 등이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성격과 심리에 기초한 구분이므로 생물학적 성 차이는 아니다. 생물학적 성과 구분하여, 남성성과 여성성은 ‘사회적 성’ 혹은 젠더(gender)라 부른다.
어떤 인간이 남성성을 지닌다면 생물학적 남자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어떤 인간이 여성성을 지닌다면 생물학적 여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생물학적 남자는 남성성을 지녀야만 참다운 남성이며, 생물학적 여자는 여성성을 지녀야만 참다운 여성이라고 여긴다. 젠더를 결정하는 근거를 섹스로 ‘환원’시키는 이런 이론은 ‘생물학적 환원론’이다. 생물학적 환원론은 젠더를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젠더 이분법의 근거를 생물학적 남자와 생물학적 여자라는 섹스 이분법으로 제시한다. 젠더 이분법의 근원을 정신 차이(젠더)가 아니라 몸 차이(섹스)로 규정하는 것이다.
젠더를 구성하는 결정적 요인이 섹스라고 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주변에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이지만, 여자 같은 성격을 지닌 남자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젠더는 생물학적 몸과 필연적 관계가 없다. 사회적 성이라는 말 그대로 한 개인에게 주어진 사회적 조건과 환경이 젠더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젠더 차이가 생물학적 몸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면, 젠더를 ‘남성성/여성성’으로 이분할 필요도 없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여자 이분법’을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적 성을 ‘남성성/여성성 이분법’ 구조로 밀고 나갈 이유가 없다.
오늘날에는 젠더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의미 있는 다층화를 이루기 위해 사회적 조건과 관련이 있는 넓은 의미의 ‘문화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서 다문화주의적 성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같은 여자라고 해도 민족, 계급, 나이, 교육정도, 직업, 종교, 결혼 조건 등과 같은 문화 차이에 따라 사회적 성이 다르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한 국가 안에서도 차이가 형성된다. 여자는 남자와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한 국가 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니는 여자들끼리도 차이가 있다.
“아들인데, 하는 짓은 딸 같아!”라는 말에서처럼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 ‘성 정체성’이 일시적으로 생물학적 성과 다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섹스와 일치하지 않는 젠더 정체성을 지니는 사람도 있다. 몸은 남자인데 여성 정체성을 지니거나, 몸은 여자인데 남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 몸은 남자이지만 성격과 심리는 여성적이라서 여자가 되고 싶고, 여성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게이, 여자가 아닌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호모, 몸은 여자이지만 남자가 되고 싶고 남성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사람, 남자가 아닌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레즈비언 등 다양한 성 정체성이 존재한다. 어떤 성에게 자발적으로 끌리는 ‘성적지향’이 이들에게는 이성애와 다른 경향으로 나타난다. 남자이지만 ‘여성적 성적 지향’을 지니거나, 여자이지만 ‘남성적 성적 지향’을 지닌 사람은 끊임없이 성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생물학적 몸과 관계없이 성적 지향에 맞추어서 살거나, 아니면 성 전환 수술을 하여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이다.
성격, 심리, 정신이 변하듯이 생물학적 몸도 변한다. 변화의 정도 차이는 잇지만, 젠더도 섹스도 변하고 있다. 섹스와 젠더는 독자성이 있지만, 젠더도 섹스에, 섹스도 젠더에 영향을 미치는 연관 고리들을 동시에 지닌다.
문화와 몸 간의 영향 관계와 변화 가능성을 찾아가면 고정된 젠더도 고정된 섹스도 없다. 남녀를 생물학적으로 구분하는 데 근거가 되는 성 호르몬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테스토스테론을 남성 호르몬, 에스토스테론을 여성 호르몬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호르몬은 남녀 모두에게 있으며,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호르몬을 보유하면서 그 중 어떤 호르몬을 특화시키느냐 따라 남자가 되기도 하고, 남성성을 지니기도 한다. 환경 요인에 따라 호르몬 양과 활성화 정도가 달라진다. 생물학적 요소들은 하나의 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변수들을 지니고 있다.
인류 역사는 가부장제와 생물학적 환원론에 기초한 성 정체성, 이성애적 성적 지향을 정상 젠더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 양성을 지니고 태어난 자웅동체나,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지닌 사람이나, 성 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 등은 비정상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들은 가치가 폄하되기도 하고, 심지어 범죄자나 정신병자로 취급되어 살해되기도 했다. 다수가 지니는 성적 지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수에 의해 성적으로 억압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비난과 비하를 담고 있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자웅동체 같은 표현들을 피하면서, 성적으로 억압받은 소수이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적 소수자’로 부를 것을 권하고 있다. 양성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다수의 이성애자와는 다른 소수의 사람들을 삶의 조건을 고려하여 배려하려고 한다.
우리는 경제적 경계뿐만 아니라 문화적 경계까지도 불투명해지는 현상들 속에서 다양한 문화들간의 접목과 충돌, 융합과 혼재, 나아가 새로운 문화 창출의 가능성 속에 있다. 한국으로의 이주, 국제결혼율이 높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다문화 가족을 염두에 둔다면,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드러내는 젠더 차이를 정상-비정상, 중심-주변과 같은 위계적 개념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바꿔야 하다.
이정은 / 연세대학교 철학과 외래교수
* 위 글은 이정은 교수의 글에서 발췌한 것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 삶을 묻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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