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동백꽃

송담(松潭) 2018. 4. 6. 06:34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문정희 / <동백꽃>중에서

 

 

 

 

단호한 참수

 

 

 

 동백을 절실하게 품었던 때는 사십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다. 나는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했다. 언제나 가슴 설레며 해온 일이지만, 어느 순간 피로감을 느꼈다. 이 한계령을 그만 내려가고 싶었다. 동백꽃이 붉은 꽃잎을 피워 올리듯 내 모든 것을 기자라는 직업에 내던졌지만, 삶의 무게가 내 등을 떠미는 듯했다.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이 시의 단호한 참수란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내가 실천해야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무에 붙어서 점점 시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에 자신을 툭 떨어뜨리는 그 황홀한 모습이 부러웠다. 동백꽃처럼 앞뒤 안 돌아보고 한순간에 떨어지리라. 2~3년간 시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로 떠났다.

 

 고향 제주로 내려온 것은 31년 만이었다. 제주에서 올레길을 내면서 동백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전에는 가장 단호하게 떨어지고 가장 화려한 순간에 소멸하는 동백만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홀겹 토종 동백꽃들이 무리를 지어 길에 떨어져 있는 모습, 마치 붉은 카펫 같았다. 덜어진 뒤의 모습도 이렇게 아름답구나. 꽃무덤으로 누군가에게 꽃길을 열어주는구나 싶었다. 낙화 이후에도 비단길을 여는 동백을 보면서 이웃에게 꽃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나의 마지막이 저 동백 같기를 소망한다.

 

서명숙 한국에 올레 신드룸을 일으킨 제주올레 이사장이다. 20여 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여기자 최초로 시사주간지 정치부장과 편집장을 지냈다.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끝으로 기자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올레길을 열었다.

 

 

정재숙 엮음 / ‘나를 흔든 시 한 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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