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하여
선생님과 가까우셨던 중광 스님은 “괜히 왔다 간다”는 유머러스한 열반송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이 미리 열반송을 남기신다면?
“서산머리 구름조각 거처가 없다.” 뭐 이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가고 오는 것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연민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가 쓴 시 중에 이런 게 있다. “이백 칸 선방에 촛불 켜고 사는데 / 누가 나한테 도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 소매 끝을 털어 보이리라.”
삶과 죽음에 대한 초연함을 선승(禪僧)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고, 꼭 아니더라도 성자들의 삶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으로서는 죽음에 초연하기 무척 힘든 일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누에의 한 살이를 생각해 보라. 맨 처음은 알이다. 알은 수학적으로 1차원적인 ‘점’으로 존재한다. 물론 나름대로 사고하고 숨을 쉬고 생리적인 활동을 한다. 다만 영유하는 공간이 1차원적으로, 붙박여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애벌레다. 애벌레로의 탄생은 알의 죽음이며, 죽음은 다른 삶으로의 이행이다. 그리고 차원의 이동이 발생한다. 애벌레는 점에서 면으로 옮겨 2차원의 공간에서 살아가게 된다.
석잠 자기, 넉잠 자기, 다섯잠 자기를 거쳐 번데기가 되고, 실을 토해 스스로 고치 안에 가두는 시련을 거친 후 마침내 날개를 가진 나방이 된다. 누에의 죽음은 나방의 탄생을 불러오고,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생명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누에의 한 살이는 차원의 이동을 통해 세계를 달리한다. 세계의 변모가 삶과 죽음의 단절이 아니며, 자아는 여전히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찍이 헤르만 헤세가 소설 <데미안>에서 얘기한 아브락사스는 이를 상징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이외수/‘마음에서 마음으로’ 중에서
사진출처 : 유형민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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