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바이칼

송담(松潭) 2013. 4. 9. 15:40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바이칼

 

 

 

 

 한겨울에 바이칼 호수를 알현하러 떠나는 길은 춥기도 하지만 멀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고구려를 자기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같잖은 동북공정 소동이 알타이 민족의 시원을 확인시키는 엄동설한의 길을 재촉했는지 모른다. 먼저 72시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가서 다시 버스로 8시간을 가야 바이칼이다.

 

 횡단열차의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 항일운동가들이 일제의 칼날을 피해 러시아 국경을 넘어 신한촌을 건설했던 해삼위라고 불렸던 곳이다. 정주영 회장이 오래 전에 세운 현대호텔 건물이 반갑다.

 

 이곳에서 삭풍회의 전설을 듣는다. 해방이 되고, 일제징병에 끌려간 한국청년들도 패전국 일본의 관동군으로 분류되어 시베리아 개발의 강제노동에 동원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 관심도 갖지 못한 죄송스러움에 고개를 떨군다.

 

 꼬박 3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기차가 삶을 느리게 살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벌써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시베리아의 달빛에 젖는다. 액자 사진의 슬라이드처럼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태고의 원시림을 온통 뒤덮은 자작나무숲에 지칠 때이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그러면서 이르쿠츠크의 역사가 떠오른다. 서유럽 자유의 세례를 받은 젊은 장교들은 182512월 혁명을 감행했으나 시대는 아직 그들의 시간이 아니었다. 시대는 항상 역사라는 이름으로 선각자의 희망보다 반발짝 더디게 굴러가기 때문이다.

 

 귀족 청년장교들인 데카브리스트는 참혹한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더 뜨거운 사랑과 영원한 자유를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 그들 미완의 혁명을 온몸으로 완성한지도 모른다. 그 중심에 이르쿠츠크가 있다.

 

 바이칼 호수의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선착장까지는 8시간을 버스로 달려야 한다. 시베리아의 눈발은 습기가 없어서 바람에 날리는 탓에 눈길 버스 운행이 가능하다. 한겨울이라 오가는 차량이 뜸해 설원을 가르는 우리의 행군은 조금은 외로워 보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의 솟대 같은 세르게 기둥이 곳곳에서 우리의 안녕을 비는 듯 추위 속에 서 있다. 나뭇가지나 나무허리에 묶어둔 소망을 비는 형형색색의 헝겊인 지아라가 삭풍에 떨고 있다. 잠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자작나무 처녀림을 직접 만져보기 위해서는 무릎 넘게 빠지는 눈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선착장에는 미지의 세계로의 입국 수속 절차도 없다. 바이칼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설레인 우리들만이 강파른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설원 위에 서 있다. 마중 나온 개조된 지프에 실려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위를 달려 알혼 섬에 바로 상륙한다.

 

 섣달 그믐의 바이칼 호수는 주변의 하얀 산까지 아우른 광대무변의 설국 그 자체이다. 1m 넘게 얼어붙어 콘크리트보다 더 튼튼하다는 바이칼 위를 지프로 달린다. 불한바위 앞에 선다. 거대한 생명의 살아있는 지구의 자궁이 이곳임을 선험적으로라도 느껴야 한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이곳을 민족의 시원으로 읽어냈다.

 

 저녁에는 바냐라는 러시아식 사우나에서 바이칼의 환상체험에 얼어붙은 몸을 맡겼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자학은 아니지만 자작나무 가지로 땀에 젖은 온몸을 때린다. 자작나무의 향이 온몸을 감싸며 우주의 몽혼한 기분이 든다. 옛날 초야에는 자작나무 조각들로 화촉을 밝히며 새 생명의 잉태를 기원했나 보다.

 

 바이칼의 마지막 밤에는 별들의 폭포를 보아야 한다. 가없는 빙판에 반사되는 별빛도 금방 얼어붙는다. 오늘 밤 얼어붙은 별 하나를 내 가슴에 품어야 하는 우주의 신비를 겸허하게 세례받아야 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시베리아의 푸른 눈, 초승달 모양의 바이칼은 이제 만월(滿月)의 달로 두둥실 떠오를 일만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끝닿은 데 없는 민족의 시원을 여기에서 찾을 일이다.

 

조상호 / ()나남출판 대표이사

(2013.4.9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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