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우리들의 자화상
흔히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생활 풍습과 사상, 행동 양식 등이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건축이란... 집을 통해 그 사람의 자화상을 그려 주는 것”이라는 건축가 김중업의 말도 곱씹어 볼 만하다. 집이라는 자화상에 비친 얼굴은 집의 주인뿐 아니라 집을 만들어 낸 건축가의 얼굴이기도 하다. 제대로 만든 집은 자연히 주인을 닮고 건축가를 닮는다. 맨얼굴을 보여야 하므로, 주인이나 건축가나 자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을 가꾸어야 한다.
한번은 진품을 가려 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대작 초상화가 나왔다. 인물이 상당히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데다 심지어 화려한 관복에는 금칠까지 되어 있었다. 그 얼마 전 나왔던 초상화가 2억 원 정도 되었던 걸 본적이 있어서 저 그림도 가격이 만만치는 않겠다 싶었다. 그런데 감정 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금액이었다.
감정위원은 그 그림이 기교적인 면에서는 빠지지 않지만, 그려진 사람의 정신이 담겨 있지 않다고 평했다. 즉 대상의 외형은 닮았으되, 그 내면의 세계는 닮지 못했던 것이다. 내면을 그리는 일도 어렵겠지만, 또 그것을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이더라도, 단원 김홍도나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마음을 두드리는 파장 같은 것이 느껴져 온다. 아마도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자신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니, 한껏 마음을 담아 그렸을 것이고, 그것이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서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집은 개인뿐만 아니라 시대를 비춘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아파트가 절대적 가치로 다가왔던 것은 이른바 ‘환금성’과 ‘경제성’이라는 기준, 즉 집값이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끝없이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집값이 오른다는 말에서 ‘오르다’란 언뜻 보기에는 진행형 동사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완결형이자, 수동태다. 그 ‘오른다는 것’은 주체인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주체를 소외시킨다. 특히 수치적 가치로서 ‘오르다’는 적어도 자본주의에 속한 시간에서는 ‘소유’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소유한 사람에게는 더 큰 여유를, 소유하려는 사람에게는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리하여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오른다’는 것은 커다란 열망이 된다. 오른다는 것은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를 점점 벌리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르고 있거나 이미 오른 것에게 다시 내려간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이다. ‘오르는 것들’은 클수록, 너무 커져서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일수록 더 큰 환영을 받는다. 집값이 올랐을 때 그 ‘집’은, 매일매일 쓸고 닦고 만지며, 낡은 벽지를 갈고, 화해할 수밖에 없는 식구들의 소소한 다툼도 덮어 주곤 했던 그 ‘집’이 아니다.
집의 숨은 역사는, 방의 개수와 거실의 넓이와 전철역까지의 거리 앞에서 무력하다. 어디의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가 그 사람의 자리를 대변해 준다. 면적이 넓을수록, 층수가 높을수록 사는 사람의 위치까지 높아진다.
‘집’으로서가 아니라 ‘오르고자 하는 기대’의 상징으로서, 우리나라 사람 둘 중에 하나는 아파트에 산다. 아침저녁으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재건축 소식으로 행여 집값이 오를까 쑥덕거리며, 이왕이면 용적률 기준도 올라서 더 높고 더 넓은 집이 되기를 바란다. ‘오르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일 뿐이지만, 어느새 둘은 동일시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올라가는 것만을 생각하며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그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판교 로또니, 뉴타운이니 하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사업들이 하나 둘 뚜껑을 열어 보니 아무런 이익이 남지 않는 헛된 꿈이었고, 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다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갈 곳 모른 채 허둥대고 있다. 그것이 ‘집’을 ‘집’이 아니라 ‘부동산’ 혹은 ‘개발상품’이라고 부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 2 >
옛사람들은 작게는 2~3평 정도의 집에 만 권의 책을 담았고, 우주를 담았다. 그러면서도 그 집에 주변의 자연을 담았고 세상의 인재들을 모아서 키웠다.
기껏해야 다섯 평 남짓한 도산서당에서 말년을 보낸 퇴계 이황뿐만아니라 남명 조식은 60세에 덕산으로 가서 ‘산천재’를 지었다. 우암 송시열도 ‘남간정사’를 짓고 반 평짜리 작은 방에 몸을 뉘었다.
< 3 >
가끔 사람들이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전통 건축을 보고 와서는 비분강개한다. 그 거대한 스케일, 혹은 그 치밀한 디테일에 비하면 도대체 우리의 건축은 무엇이냐며 자기 비하를 한다. 또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강요하고 외우게 하고 자긍심을 가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화를 낸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공간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고, 공간의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공간은 움직이고 흐른다. 우리의 조상들은 공간을 그릇이라고 보지 않았다. 공간, 그리고 땅이란 것을 생명체로 보았다. 그것도 용과 같이 기운이 넘쳐서 펄떡펄떡 날뛰는 생명체로 보았다. 그 위에 인간을 얹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다. 고민의 방향과 각도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멈추게 해 놓고, 박제해 놓고, 분재를 만들어 놓고 감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운은 기운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했다. 그래서 우리의 공간을 잡아내는 일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리고 일정한 눈금을 가진 계량컵이나 줄자나 저울로 재 보고 측정해 보기가 어렵다.
< 4 >
집이 다 지어질 무렵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제는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습관이 되었지만 익숙해지진 않는다. 마치 큰 시험을 앞두고 준비하던 사람이 마침내 시험을 보기 위해 시험장에 들어가기 직전의 심리 상태 같기도 하고, 수많은 대중 앞에서 무언가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할 때와 같이 앞으로 닥칠 거대한 파도 앞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사람과 같다.
그것은 집이라는 것이, 그저 관념 속에 있었던 집이라는 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 결과물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질까 하는 노심초사가 아니다. 마치 집이 지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처럼 집이 다 지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다. 정말 이상한 심리 상태다.
그런 노심초사와 히스테리가 동반한 패닉 상태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무척 힘들다. 무엇에 대한 욕망은 있으나 그 욕망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정신없이 휘둘리고 계속 불안해 한다. 그러다 보면 자주 변경을 하게 되고 공사기간도 길어지고 결국 코끼리의 코에 앵무새의 부리, 하마의 눈..... 하는 식으로 이상한 이종교배가 이루어진다. 짓는 사람도, 들어가 살 사람도, 심지어 집조차 만신창이가 되어 나뒹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설계 과정에서부터 지어질 집에 대한 사항들을 최대한 이해를 시키면서 진행하려고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모형을 만들어 보여 주며 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는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설계에 들어가면 나는 제일 먼저 땅을 보고 스케치북에 땅을 스케치하고, 그 다음 간단하게 집의 윤곽을 그린다. 그때 내가 보았던 땅의 모습과 그 땅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 그리고 그 장점과 단점, 보완점 등이 차례로 머릿속에서 열거된다. 각각에 대한 건축적 대응이 바닥에 깔리고 그 땅을 보면서 느꼈던 나의 건축적 바람, 가령 ‘이 당에는 하늘을 보기 좋은 자리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혹은 어느 귀퉁이에 ‘아래쪽으로 예쁘게 흘러가는 길을 볼 수 있는 의자 혹은 그루터기가 하나 있으면 좋겠구나’하는 바람을 깔고 그 위에 단위 공간들을 넣기 시작한다.
< 5 >
누구든 집을 지으려 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기준을 자기에게 두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과 안목 없이 남의 시선이나 체면 등에 휘둘릴수록 거품이 들어가는 법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 위에 놓인 불필요한 짐들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과, 있을 수도 있지만 ‘없어도 되는 것’ 그리고 ‘없어야 되는 것’을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작은 집’이란, 정말 크기가 작은 집이라기보다는 ‘적절한 집’을 말한다. 즉 집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로 돌아간 소박한 집, 적당한 집, 본연의 집을 의미 한다. 더불어 거품을 뺀 집, 환경을 생각하는 집,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집을 의미한다. 공간이 사람을 지배하지 않도록,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편안한 재료로, 내 몸에 맞는 규모로 짓는 집.... 그렇게 내가 사는 공간을 가꾸는 것도 문화다.
< 6 >
‘집과 따뜻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금은 아무리 찾아 헤매도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만화책이다. 《오똑이 대행진》이라는 제목의 세 권짜리 만화였는데 어느 소도시의 조그만 아파트에 직업이 형사인 아버지와 전형적인 현모양처 어머니, 그리고 대학생부터 갓난쟁이까지 남매들로 구성된 가족에게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사를 담담하게 그렸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 집 낡은 거실에서 엄마가 아이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컵에 따라주며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전체 줄거리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 장면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집의 따듯함이란 아마 그런 조그만 탁자의 위아래로 번지는 그런 정서적인 훈기라고 생각한다. 무쇠로 만들어진 투박한 난로 위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수증기 같은 것이다. 혹은 아랫목에는 항상 이불이 있고, 그 안으로 무릎들이 모여 있는, 온기가 있는 방을 가진 그런 집이다.
그런 따뜻함이 있는 집을 만들고 싶다. 내가 사는 곳 또한 그런 집이였으면 좋겠다.
임형남+노은주 / ‘작은 집, 큰 생각’중에서
임씨 부부는 4.5칸에 불과한 도산서당을 모델로 해 43㎡(13평)의 방 두 칸에 26㎡(8평) 마루를 둔 한일자로 된, 가장 보편적이고 평이한 형태의 집을 설계했다. 동쪽으로 두 칸 규모의 마루를 놓고 이어 한 칸짜리 방 두 개가 이어지고 서쪽 반 칸에 부엌과 화장실, 보일러실과 서재를 집어넣었다.
금산주택이 완공된 이후 주변 반응은 뜨거웠다고 한다. '디자인붐'이나 '아크데일리' 같은 외국의 주요 디자인 웹진에 금산주택이 소개됐고,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모한 한국공간디자인 대상에서 최고 영예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김용출 기자/ 2011.11.11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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