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죽지 않고 사라지다
어둠이 밀려오고 제법 찬바람이 불었다. 행사는 마지막을 예고했다. 고인이 가장 좋아할 퍼포먼스라는 설명이 따랐다. ‘촛불타워’라는 제목으로, ‘백남준을 위한 메시지’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참석한 사람마다 촛불을 들고, 단상의 피아노로 가서 촛농을 부으며 건반을 두드리며 고인에게 할 말을 한 뒤, 마당의 흰 탑 밑에 그 촛불을 모아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남들이 하는 대로 줄지어 서서 촛불이 켜진 종이컵을 들었다. 피아노를 두드리는 것도 각양각색이었다. 꽝, 꽝꽝, 뚜르르르르, 콰광....... 나는 가볍게 세 번 두드리고 아래쪽 탑으로 향했다. 말이 탑이지 플라스틱 안에 공기를 집어넣어 부풀려 만든 설치물이었다. ‘다다익선’을 본따 만들었다고 했으나, 멋없이 삐죽 솟은 모양새나 크기는 볼품이 없었다. 행렬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느덧 돌아가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거두고 있는 굿판을 기웃거리며 떡과 과일과 과자를 얻어 비닐봉지에 담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대충 헤아려 본 종이컵 촛불은 한 삼백 개 남짓이었다. 시청 앞에 모여들어 촛불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에워싸고 받드는 분위기였다. 나는 작품 ‘촛불’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촛불 몇 백 개가 빛을 밝히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광경이 모니터에 어리는 듯싶었다. 제목에 ‘서울 랩소디’처럼 ‘랩소디’를 붙였으면 어떨까도 여겨졌다. ‘촛불 랩소디’ 그것은 촛불의 광시곡(狂詩曲)과 같았다. 드디어 사십구제는 끝났는가. 유골이 되어 돌아온 고향땅에서 그의 넋은 ‘나느은 가요오’ 노래를 부르며 머나먼 정토(淨土)로 가서 누웠는가. 모든 것은 끝났는가.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퍼포먼스는 그제서야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또 한 번 조카와 한하르트가 나와서 피아노 앞에 섰다. ‘고인이 가장 좋아 할’ 장면은 정작 그것이었다. 모두들 그쪽으로 얼굴을 들었다. 하나, 둘, 셋. 그들이 힘을 합쳐 밀자, 피아노가 뒤로 자빠졌다. 뚜껑이 떨어져 튕겼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신 때려부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를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였던 퍼포먼스는 그것이 절정이었다. 사십구제는 끝났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났는가 했더니, 아니었다. 이윽고 누군가 설치물 탑에 불을 붙였다. 퍼포먼스는 게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탑 바깥쪽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안쪽의 탑이 밑으로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다다익선’이 그를 그러안고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나 자산에게 말했다. 그래 환과 멸. 그것이었어. 촛불은 언제까지나 펄럭이며 어둠을 밝히고 있건만, 그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내 귀에 울렸다. 사라지지만, 죽지는 않아. 탑이 촛불 아래로 잦아들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사라졌다. 그 뒤에 촛불들만이 외로움과 그리움을 밝히듯 빛을 모으고 있었다. 촛불의 광시곡. 사십구제는 끝났다.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을 향해 대형 스크린에 백남준이 나와 손을 흔들었다. 푸른 윗도리의 소매를 걷어 올린 손이 웃는 얼굴과 함께 크게 다가왔다. 잘 가시오. 나도 잘 왔다 가오. 짧은 머리카락과 거뭇거뭇한 수염의 그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뒤돌아보려는 충동을 찍어 누르며 발길을 옮겼다. 몇 걸음 떼어 놓고 나서 기어코 뒤돌아본 화면에는 그의 모습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환과 멸의 명백한 증거 같았다. 나는 그가 사라진 화면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비어있는 화면 속으로 대신 내가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길은 없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윤후명 / ‘새의 말을 듣다’중에서
고 백남준의 위대한 업적 만큼 밝게 타오르는 촛불들이
영생극락을 기원했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의 49재가열린 봉은사 연못에
연등이 밝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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