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세 사람이 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마치 세 명의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봅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드(Id), 초자아(Superego), 자아(Ego)입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이드는 욕망의 대변자입니다. 자아는 중재자입니다. 초자아는 자아이상(ego ideal), 도덕, 윤리, 양심의 대변자입니다. 이드는 욕구를 주장하고, 초자아는 금지된 일을 못하게 막아서거나 이상을 추구하고, 자아는 타협점을 찾습니다.
이드는 충동적인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원초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이드를 움직이는 힘은 쾌락원칙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금방 이루기를 원합니다. 이드는 참고 기다리지 못합니다. 당장 원하는 과자를 주어야 울음을 그치는 아이와 같습니다. 과자를 먹지 않고 조금 참으면 더 맛있는 식사가 기다린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에 반해 더 큰 보상을 위해 참을 수 있다면 현실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드가 강해지면 마음의 세계에는 비상이 걸립니다. 술이나 약으로 이드의 힘이 세지면 인간은 이성이 아닌 본능적 충동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초자아는 나를 관찰하고 비판하고 벌합니다. 초자아는 나를 격려하고 분발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초자아의 눈에 비추어 도덕적이지 않으면 죄책감을, 추구하는 가치나 이상에 미치지 못하면 수치감을 느끼게 됩니다.
초자아가 너무 힘이 세면 인생이 고단합니다. ‘모범생’으로만 살아야 되니까요. 모범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초자아가 너무 엄격하면 언제 화를 낼지 몰라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자기를 야단치고 벌주는 일도 벌어집니다.
반대로 초자아가 너무 약하면 본능적 충동이 이드에서 거침없이 올라옵니다. 나쁜 짓이나 하는 ‘사고뭉치’가 되기 십상이지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힘이 없는 초자아가 말리고 나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독일어로 ‘나(das ich)’입니다. 자아는 중재자입니다. 자아는 이드, 초자아, 현실 사이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협상을 주도합니다. 원하는 것을 무조건 이루려는 이드와 도덕적 잣대를 제시하는 초자아 그리고 냉엄한 현실 사이에서 자아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친구의 남자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이드의 행동입니다. 이성에게 느끼는 호감은 쉽게 제어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초자아는 말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 윤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러니 그 남자를 잊어 버려라.” 처해있는 현실도 초자아를 거들면서 요구하고 나섭니다. “그러다가 큰일 난다. 친구가 알게 되면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만둬라.” 이럴 때 자아는 현실과 초자아와 이드 간에 협상을 하도록 시도합니다. 그 결과를 ‘타협형성(compromise formation)’이라고 부르는데, “그래, 그렇다면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타협성을 이끌어 내는 자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힘있는 자아는 고통스러운 일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자아의 힘을 키워 놓아야 합니다. 자아의 힘을 키우려면 다소의 시련은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아는 방어기제를 동원해 스스로를 무의식의 공격으로부터 지킵니다. 예컨대 실연의 고통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불쑥불쑥 나를 괴롭힙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언젠가는 “남자가 어디 저 혼자뿐이야!”하며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힘은 바로 자아에서 나옵니다. 자아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의식의 세계에서 몰아내고 어려움을 견디도록 하는 힘입니다.
정도언 / ‘프로이트의 의자’중에서
< 참고자료 >
S.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 영역안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을 밝혀 내려하는 학문의 한 종류로써 S.프로이드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연구하는 심리학으로 정신병의 치료나 사회현상의 연구 등에 응용된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대부분의 행동이 무의식의 힘에 의하여 유발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편, 인간의 정신 과정은 대체로 무의식적이며
인간의 모든 행동은 리비도(Libido,성적 에너지)에 의해 유발된다는 두 전제에 입각해 있다.
그가 이러한 전제 위에 만든 도표에 의하면
인간은 이드(id)와 자아(ego) 및 초자아(superego)라는
3종의 정신대를 지니고 있는데,
이드는 전적으로 무의식이며,
자아와 초자아만이 부분적으로 의식의 정신 과정에 놓여 있다.
이드는 리비도의 저장소이며, 모든 정신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쾌락원칙(pleasure priciple)에 따라 본능적인 욕구를 만족시킬 뿐, 사회적 질서나 도덕과 같은 가치 관념과는 관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드는 사회적인 제약을 돌보지 않고 제멋대로 활동하는 무의식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개인과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제어하는 정신적인 요인이 요구되는데
이것이 곧 자아이다.
자아는 이드와 같이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드의 본능적 충동이 파괴적 행동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통제하는데 그 기능이 있다.
이드는 길들지 않는 열정으로 대하는데 반해,
자아는 이성과 신중을 지향한다.
쾌락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이드와 달리,
자아는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서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아가 이드를 통제하고 개인을 보호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면 초자아는 사회를 보호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초자아는 도덕적인 모든 제약의 대표, 즉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우리가 인간생활에서 보다 차원 높은 것이라고 일컫는 바에 대해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하는 것이라고 한다.
초자아는 사회의 윤리 도덕의 핵심으로서
성욕 도착증이나 오이디푸스 본능과 같은 것을 통제하는 기능을 지니는데 이는 주로 부모의 교육을 통해 형성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가지 정신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일인데,
이러한 사람을 건강하다고 한다.
* S.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의학자)
< 참고 : 심리학 용어 >
투사(projection)
나는 화가 납니다. 그런데 화를 내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투사’입니다. 화난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내 탓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나의 나쁜 점이나 내가 잘못한 것을 타인의 나쁜 점으로, 타인의 잘못으로 돌려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망상적 투사’는 더 심한 형태입니다. 망상적 투사는 자신이 가진 망상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객관적이고 합당한 이유가 없이) 사람이 있을 때 사실은 자기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을 이유 없이 죽도록 미워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미워한다는 감정과 그가 죽기를 바란다는 소망 자체가 불러오는 죄책감이 너무 크고 고통스러워 피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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