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목민심서 / 다산연구회

송담(松潭) 2008. 5. 12. 06:48
 

 

목민심서 / 다산연구회 


1.

한결같이 곧게 법만 지키다 보면 때로는 일 처리에 너무 구애받을 수도 있다. 다소 넘나듦이 있더라도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옛사람도 혹 변통하는 수가 있었다. 요컨대 자기의 마음이 천리의 공평함에서 나왔다면 반드시 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으나, 자기의 마음이 사사로운 욕심에서 나왔다면 조금도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 법을 어겨 죄를 받는 날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 법을 어긴 것이 반드시 백성을 이롭고 편하게 한 일이니, 이 같은 경우는 다소 넘나듦이 있을 수 있다.


2.

사대부의 벼슬살이하는 법은 언제라도 벼슬을 버린다는 의미로 ‘버릴 기(棄)’ 한 자를 벽에 써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아야 한다. 행동에 장애가 있거나,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거나, 상관이 무례하거나, 내 뜻이 행해지지 않으면 벼슬을 버려야 한다. 감사가 내가 언제든지 벼슬을 가볍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며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수령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를 잃을까 저어하여 황송하고 두려워하는 말씨와 표정이 드러나면, 상관이 나를 업신여겨 계속 독촉만 하게 될 것이니 오히려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상관과 하관의 서열이 본래 엄한 것이나, 비록 사의를 표명하여 관인을 던지고 결연히 돌아가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말씨와 태도는 마땅히 온순하고 겸손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울분을 터뜨리지 않아야 비로소 예에 맞다고 할 수 있다.



3.

전임자와 동료로서의 우의가 있기 때문에 교대할 때에 옛사람들은 후덕함을 알아, 전임자가 비록 탐욕스럽고 불법을 저질러서 그 해독이 가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화평하고 조용히 고쳐서 전임자의 행적이 폭로되지 않게 하는데 힘썼다. 만일 급박하고 시끄럽게 일일이 지난 정사를 뒤집고 큰 추위 뒤에 따뜻한 봄이 온 것처럼 자처하여 혁혁한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면, 이는 그 덕이 경박할 뿐 아니라 뒤처리를 잘 하는 것이 아니다.



4.

구양수가 개봉부(府)를 맡았는데 그는 전임자인 포중의 위엄있는 정사 대신에 간단하고 편하게 순리를 따를 뿐 혁혁한 명성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군(郡)을 거치면서 치적을 구하지 않고 관대하고 간략하며 시끄럽지 않은 것에 뜻을 두었다. 따라서 벼슬살이한 곳이 큰 군이었지만 부임한 지 보름이 지나면 벌써 일이 열 가지 중에서 대여섯 가지가 줄어들고, 한두 달 후가 되면 관청이 마치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이 “정사는 관대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일이 해이해지거나 중단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내가 말하는 관대하다는 것은 가혹하게 급히 서둔다는 것이 아니며, 간단하고 편하다는 것은 번잡스럽지 않다는 것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성이 편안하다고 하면 곧 그가 훌륭한 수령이다”라고 말했다.

 

이상 1~4 : '봉공(奉公)' 편에서

 

 

5.

 늘 보면 수령으로서 세련되지 못한 자는 갑(甲)이 제소해오면 갑이 옳다고 장황하게 논단하여 을(乙)을 간사한 자로 만들고, 을이 제소해오면 을이 옳다고 하여 앞의 견해를 완전히 뒤집어 갑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두 번 세 번 뒤집어엎고 아침저녁으로 변하여 이리저리 잘 움직이는 것이 익힌 노루가죽 같고 엎치락뒤치락 종잡을 수 없는 성낸 두꺼비 씨름 같아, 조롱하는 소리가 온 고을에 넘칠 것이다. 이는 크게 삼가야 할 일이다.


‘형전(刑典)’편에서



6.

김효성은 고을살이가 청백하였다. 그 부인 이씨(李氏)는 늘 고을살이에서 물러나 돌아올 때에는 비복(婢僕)들을 주의시켜 관부에서 가져다 쓴 기물들을 모두 돌려주게 하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전이 부엌에서 쓰고 남은 것을 바치자 물리쳐 받지 않으면서 “이는 그분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남편을 여윈 뒤 아들을 봉양을 좇아 고을살이 갈 때에도 항상 낡은 농 두 짝을 가지고 다녔는데, 아들이 농을 바꾸기를 청하자, “나는 너의 돌아가신 아버님을 따라 여러 고을을 30년이나 두루 다녔지만 가지고 다닌 것은 이것뿐이었다. 지금은 사람도 농짝도 함께 늙었으니 어찌 차마 버리겠는가?”라고 말했다.


‘공전(工典)’편에서



7.

고려 유석은 안동부사로 있을 때 선정이 많았는데, 최이와 송국첨에게 미움을 받아 무함을 당하여 암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떠나는 날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 길을 막고

“하늘이여! 우리 사또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사또가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고 울부짖으며 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호송을 맡은 군졸들이 꾸짖고 고함을 쳐서야 길이 열렸다. 그의 부인이 자녀를 거느리고 돌아가는데 사사로이 준비한 말이 세 필뿐이라 걸어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하루 더 묵기를 간청했으나 듣지 않았고, 추종을 내어서 호송하려 하자 부인이 사양하기를 “가장이 유배되었으니 그 처자들도 모두 죄인이다. 어찌 번거롭게 하겠는가.” 라고 했다. 고을 사람들이 굳게 청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참으로 우리 사또의 배필이로다”하며 감탄하였다.

 

‘해관(解官)’편에서



8.

고려의 최석이 승평부사가 되었는데, 승평의 옛 습속이 매번 수령이 갈려 돌아갈 때 반드시 말 여덟 마리를 바치되 가장 좋은 말을 골라가도록 하였다. 그가 돌아갈 때가 되자 고을 사람들이 습속을 따라 말을 바쳤다. 그는 웃으며 “말은 서울까지 갈 수 있으면 되는데, 고를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서울 집에 도착하자 그 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고을 사람들이 받으려 하지 않자, 그는 “내가 물욕이 있다고 생각하여 안 받으려 하느냐? 내 암말이 너희 고을에 있을 때 마침 망아지를 낳아 그 망아지를 데려왔다. 이는 나의 물욕이다. 지금 너희들이 말들을 돌려받지 않으려는 것은, 혹시 내가 물욕이 있음을 엿보고 겉으로 사양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말하고는 그 망아지까지 함께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그 습속이 마침내 없어졌다. 고을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八馬碑)라 불렀다.


‘해관(解官)’편에서


정선 목민심서 / 다산연구회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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