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족

사부곡(思夫曲)

송담(松潭) 2008. 4. 2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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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곡(思夫曲)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놀라워라. 412년 동안 무덤 속에 있던 한 편지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1998년 4월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의 한 양반가의 묘지를 이장하던 중에 무덤에서 여러 유품들과 함께 조선 중기에 한 여인이 쓴 한글 편지가 나왔다. 이 편지는 조선조 명종과 선조 때 살았던 경남 고성 이씨 이응태의 아내가 쓴 것이다.

 

이응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여섯 해 전인 1586년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 이응태가 먼저 죽자 그 아내가 제 마음을 편지에 담아 남편의 품에 넣어준 이것은 일종의 만사(輓詞)다.

 

편지를 읽으며 내내 마음이 서늘해진 것은 죽은 지아비에 대한 애정 표현의 거침없음과 뼈에 사무치는 그 간절함 때문이다. 이 편지를 쓴 이의 이름이 ‘고성 이씨’라는 것 말고는 알 길이 없고, 그 무덤도 어디에 썼는지 알 수가 없다. 애석한 일이다.

 

 

흰 나무패 눈에 아픈/ 임자 무덤 앞에 손을 짚으면/ 잊은 줄만 믿었던/ 슬픔이 파도처럼 밀리어 오오/ 임자 하얀 손이 여기에 있소/ 임자 푸른 눈동자가 여기에 있소/ 되살아오는 가지가지 말씀/ 몰래 홀로 앓다가/ 몰래 홀로 눈감은/ 임자는 지금도/ 먼 파도 소리에 홀로 귀 기울이고 있소이까// 수풀 속에 소소로이 흔들리는 들국화/ 들국화 들국화/ 시월달 산바람에 마구 휘불리는/ 연보랏빛 가냘픈 네 모습을/ 오오 누구라 마음하여 나는 불러볼 건가// 임자 앞에 꺾고저/ 이 산허리 어느 비탈 어느 그늘에나/ 구름처럼 들국화만 피어 있음에/ 나 다시금 눈물이 솟아..... 뜨거운 눈물이 솟아..../ 흙냉므새도 새로워 가슴 막히는/ 임자 조그마한 무덤 앞에 얼굴을 묻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순결하리라 맹세하는/ 나요/ 유정이요.

- 유정, <조그마한 무덤 앞에 >

 

이응태의 아내 고성 이씨가 쓴 사부가(思夫歌)와 정확하게 상응하는 시다. 그러니까 이 시는 먼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사부가(思婦歌)다. 두 편의 글이 다 곡진하여 마음 깊은 곳에 울리는 바 크다. 이 시를 쓴 유정은 1922년에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고, 일본 조오지대학 철학과를 중퇴한 뒤 잡지사와 신문의 기자 생활을 오래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장석주 /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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