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香遠益淸)
고전 <춘향전>에는 금쪽 같은 ‘작업용’ 대사가 많다.
“연꽃은 비록 진흙 속에서 꽃을 피우지만, 맑고 곱기가 비할 데 없으며, 그 향기 십리는 간다고 합니다.”
자신이 쓴 부용당 현판 아래서 춘향이 건넨 설명에 몽룡의 답이 걸작이다.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 연꽃의 향기는 멀수록 맑고 청아하다 하였거늘, 남원 부중에 가득한 네 향기는 동헌 내아까지 실려와 나를 취해 비틀거리게 하였으니, 춘향이는 연꽃보다 더한 꽃 중의 꽃이로다.”
그러나 향원익청은 이렇게 작업용으로 쓰일 게 아니다.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돈이는 연꽃을 사랑한 나머지, 유명한 애련설(愛蓮說)을 남겼다. 그는 여기에서 도연명이 은자의 꽃인 국화를 사랑하고, 당나라 이래 세상 사람이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을 사랑한 것에 비해, 자신이 연꽃을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진흙탕에서 피어났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리 갈수록 더욱 맑고, 그 자태 우뚝하고 고요하여
멀리서 지켜볼 뿐, 함부로 갖고 놀 수 없네 ….”
이 수필의 정수는 ‘향원익청’ 넉 자에 포함되어 있으니, 훗날 세상 사람은 군자의 품격으로 삼았고, 시인 묵객은 시제·화제로 삼았으며, 여러 군왕과 사대부는 정자와 누각의 이름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정자가 중국의 4대 정원 중 가장 크다는 쑤저우의 졸정원,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원향당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세조가 조성했다는 경복궁 안 향원지와, 고종이 그 안에 인공섬을 만들고 세운 누각 향원정이 있다. 저물어가는 가을, 멀리 그리울수록 더욱 향기로워지는 것들을 기억해 보자. 굳이 중국 쑤저우까지 갈 필요는 없다.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서어나무 따위가 막바지 붉음을 토해내는 향원정이면 족하다. 갈수록 펄밭인 선거판에서, 처염상정(處染常淨)이 따로 있겠는가.
곽병찬 논설위원 / 2007.11.6 한겨레
애국설(愛菊說)
보통 사군자(四君子)라고 하면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이다. 하지만 주렴계(周濂溪)의 ‘애련설(愛蓮說)’을 읽은 뒤부터는 난초 대신에 연꽃을 집어넣어 매(梅), 연(蓮), 국(菊), 죽(竹)을 ‘사군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른 봄에 피는 매화는 무엇 때문에 군자인가? 눈 속의 추위를 뚫고 피기 때문이다. 춥고 배고픔을 견디고 올라오는 꽃이므로 군자이다.
연꽃은 여름에 더러운 진흙 속에서 올라오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대나무는 겨울의 흰 눈 속에서도 청청(靑靑)하기 때문에 군자이다.
그렇다면 늦가을에 피는 국화는 왜 군자란 말인가? 서리를 맞으면서 피는 꽃이기 때문이다. 가을에 내리는 서리는 숙살(肅殺)의 기운을 상징한다. ‘추상(秋霜)같다’고 하지 않던가? 온갖 나무와 화초들의 그 무성하던 잎들도 그 추상 앞에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움츠러든다. 오직 국화만이 그 서리를 맞으면서도 죽지 않고 오히려 꽃을 피운다. 늦가을의 서리 속에서 피는 국화를 보면서 불굴의 기백을 배우게 된다.
어찌 기백만 느끼겠는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사람이 늦서리를 맞고도 노랗게 피는 국화를 보면 ‘남은 삶을 여한 없이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국화가 지닌 이러한 기질을 가리켜 우리 선인들은 ‘오상고절(傲霜高節)’이라고 표현하였다. ‘모진 서리에 굴복하지 않는 높은 절개’라는 뜻이다. 여기서 서리(霜)는 가난, 병고, 외로움, 이별이 될 수 있다. ‘오상고절’이면서도 국화는 부잣집 화단에서만 피는 꽃이 아니다. 이름 없는 시골 농가의 동쪽 울타리 밑에서도 핀다. 들판에서도 핀다. 국화가 부귀가(富貴家)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라면 벼슬살이 다 버리고 ‘귀거래사’를 읊었던 도연명이 어찌 좋아하였겠는가. 그 소탈함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사람이나 꽃이나 절개가 높으면서도 소탈하면 흡인력이 있기 마련이다. 국화는 또한 향(香)이 좋다. 매화향이 생명을 움트게 하는 섬세한 향이라면 국화향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침향(沈香)에 가깝다. 마음을 안정시켜서 범사(凡事)에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는 향이라고나 할까. 늦가을에는 노란 국화가 있어서 인생이 외롭지 않다.
조용헌 / 2007.11.13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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