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치유

우리는 눈물로 무엇을 해소하는가

송담(松潭) 2007. 4. 9. 22:10
 

 

우리는 눈물로 무엇을 해소하는가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송해성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프랑스 영화감독 장-자크 아노는 1986년 저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영화로 만들었다. 이런 경우 종종 원작을 훼손했다거나 적어도 원작을 살리지 못했다는 비평이 따르곤 한다.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원작자인 에코에게도 이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에코도 원작을 훼손했다고 노발대발하는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를 은근히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에코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작가는 에코이고, 영화 <장미의 이름>의 작가는 아노라는 것이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송해성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도 이런 관계에 있다. 책으로 300쪽 분량의 소설을 2시간짜리 영화로 만들려면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반면 제목이 상징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의미는 훨씬 더 집약적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오늘날 폭 넓은 대중과 함께 하는 문화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또 다른 이점도 있다. 그건, 누군가 통속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사실이다.(혼자 책을 보며 울기보다 영화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며 울 가능성이 더 크다. 울음은 이른바 ‘산사태’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이른바 ‘최루탄 영화’라고 비꼬는 평자들에 동조하는 건 아니다. 나 자신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눈물의 감동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관람하던 날 영화관에는 유난히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다. 영화 시작 전에는 사춘기의 발랄함이 넘쳐 다른 관객들을 방해할 정도로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막상 영화가 상영되자 숙연한 훌쩍거림으로 시작한 울음이,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거쳐 대단원에 이르자, 운다는 것의 부끄러움조차도 눈물로 흘려 보내는 울음으로 상승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카타르시스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관객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관객은 그 감동의 내적 파급 효과로 눈물을 쏟아냄으로써 자신을 정화(淨化)한다. 특히 비극 작품의 카타르시스 효과는 마치 무수히 많은 코를 지닌 그물을 끌어당기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의 그물코를 붙잡고 끌어당기면 다른 그물코들도 따라 나온다. 비극이 관객에 던진 감동의 그물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는 인간 감정의 그물코들과 얽히고 그들을 함께 끌어당겨 가슴속을 후련하게 쓸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은 감동의 내적 파급 효과로서 인간을 정화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넘어서 눈물의 의미를 좀 더 천착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정화를 넘어서 ‘해소(解消)’의 기능을 한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해소는 해체하고 씻어낸다는 뜻이다. 정화의 의미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그 역할은 다르다. 카타르시스 이론에서 눈물로 정화되는 것은 관객이지만, 여기서 눈물이 해소하는 것은 관객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장벽이다. 작품에 완전히 공감해서 흘리는 눈물은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모든 장벽을 해체하고 씻어낸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비극적이며 불행하다. 그러므로 관객은 그들에 곧바로 공감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거리감을 갖거나 심리적 장벽으로 불행한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것을 차단하려 한다. 주인공의 불행한 이야기가 ‘아름다운 비극’이 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눈물을 흘릴 정도에 이르러서야 그 장벽은 제거될 수 있다. 바로 흐르는 눈물로 그것을 해소하기 때문이다.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이런 해소 효과는 각 개인이 ‘인간의 의미’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영화 속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눈물로 모든 장벽을 해소해야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수는 살인강도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형 집행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이른바 사형수다. 모니카 수녀는 교도소의 교화위원으로서 윤수에게 진지한 인간애로 접근한다. 윤수는 거부하지만 그녀의 끈질긴 노력은 자신의 조카인 유정을 이 일에 끌어들이기에 이른다. 유정에겐 15살에 성폭행 당한 경험이 “자기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고, 윤수를 만나는 그 순간에도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결코 치유될 것 같지 않은 한 순간 폭력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두 사람의 만남은 도저히 해소될 것 같지 않은 장벽을 사이에 두고 시작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둘 사이에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던 무시와 불신의 장벽은 무너진다. 각자 눈물로써 자신을 해체해서 드러내는 고백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정은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있던 수치스런 상처를 낯선 남자에게 고백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봐야 했다. 그녀가 자아에 대해 갖고 있던 장벽부터 남몰래 흐르는 눈물로 해소해야 했다. 이런 그녀의 태도는 결정적으로 윤수의 마음을 연다.


 공지영 작가는 소설 속 유정의 독백을 통해 벽이 무너진 두 사람 사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먼 계곡 양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어떤 밧줄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 놓여지는 것 같았다.”

송해성 감독은 제작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두 남녀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후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포기한, 더 이상 밑을 볼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와 있는 지독히 외로운 사람들이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쉽게 ‘나쁜 사람’들로 치부해버린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런 두 남녀가 서로 소통하고, 그 소통으로 서로를 구원해내는 아름다운 과정을 목격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보고 울 수밖에 없다. 눈물로 모든 장벽을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포옹에 더 큰 포옹으로 합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단테가 그랬던가.

“그대 지금 울지 않는다면, 언제 운단 말인가?”

 

김용석 / 영산대 교수

(2007.4.9한겨레, 함께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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