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디로 임하셨나이까
예수 오신 날입니다. 간밤 예수께서는 어디로 내리셨을까요. 그냥 사람의 마음으로 헤아려보면 내릴 곳이 마땅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늘에는 주술사들의 삿된 주문이 떠돌고, 땅에는 음모의 살기가 자욱합니다. 더욱이 거룩한 날에도 친위쿠데타를 옹호하는 무리가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저들이 감히 십자가를 들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계엄령 선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살리는 일이라고 악을 쓰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을 선동하는 사탄을 향해 그저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코 ‘십자가 군병’이 될 수 없건만 저들은 알지 못합니다. 어쩌다 그리스도교가 아스팔트 위로 끌려나와 극우세력의 뒷배가 되었을까요.
이상한 것은 이런 포악한 행태를 다른 교회들(특히 대형교회)이 방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긴 침묵은 암묵적 동조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들이 숨기는 게 참 많고, 결국 그들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성서를 벗어나 세상과 타협하는 목사들을 떠올립니다. 저들은 권력과 야합하고, 교회 개혁을 방해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에게 정치색을 끼얹고 그들을 내세워 권력과 명예를 얻습니다. 신도들마저 팔아먹는 셈입니다.
유년 시절 예배당은 누추해도 정갈했습니다. 작아서 그 속에 들면 누구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들은 사연 하나씩 품고 새벽마다 교회에 모였습니다. 사연에는 슬픔이 묻어있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고요해서 아침 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들이 돌아가면 마룻바닥에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주 조용한 눈물방울들. 햇살도 그 눈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순수였습니다. 그 눈물이 세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 눈물로 나라와 민족이 굳건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를 지켜낸 것이 기도의 힘이며, 기독교가 일조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예수는 금식할 때면 머리를 빗어 남에게 티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도 또한 골방에서 하라고 일렀습니다. 한데 가난한 기도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통성기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함께 울다가 일제히 그칩니다. 목사는 예수 믿어야 부자가 된다고 소리칩니다. 예수가 언제 잘살아 본 적이 있습니까. 더럽고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번듯한 성전이 아닌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보리떡과 포도주 한잔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즘 신도들은 헌금과 통성기도가 쌓였으니 천당이 예약되었다고 믿습니다.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은 교회 안팎의 명예와 계급, 권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정의로움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냈습니다. 환전상들의 책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어버렸습니다. 돈에 오염된 무리를 꾸짖었습니다.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그러나 요즘 교회에서는 이러한 예수의 의분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그래서 복만을 받자고 합니다. 아마도 신도들의 비판의식을 일깨울까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의롭게 싸우고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지려 하니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희생은 싫고 저항은 무서울 겁니다. 자연 설교 속에 ‘의로운 저항’이 줄어들고, 대신 부쩍 이적을 내세웁니다. 세속화의 따가운 시선을 신비주의로 희석시키고 있음이지요. 하지만 나사렛 예수는 굶주리는 곳에, 불의에 의해 신음하는 곳에 살아있습니다.
예수의 길을 걸으려면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기쁨보다 교회 안에서 느끼는 절망감이 더 커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이 부흥시켰다고 교회를 자식에게 통째 물려주는 사례가 속출합니다. 교단 발전에 공이 크다며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자도 있습니다. 성전을 사유화하고, 자신을 예수 반열에 올리는 목회자들에겐 가난한 이들이 보일 리 없습니다. 그들 마음속엔 이미 거대한 바벨탑이 솟아 있습니다. 성전이 호화로울수록, 제단이 기름질수록, 찬양이 우렁찰수록 가난한 자들이 들어설 공간은 줄어듭니다. 우리 교회 목사가 영과 육에 살이 올라 뒤뚱거리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지 둘러봐야 합니다. 가난해서 쫓겨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입니다. 주여, 간밤 어디로 임하셨나이까.
김택근 / 시인
(2024.12.25 경향신문)
< 2 >
친위 쿠데타의 운명
한국 시각보다 9시간 늦은 포르투갈 12월4일 아침, 내 휴대폰에 ‘급보, 비상계엄령’이라는 문자가 갑자기 보였다. 하도 맹랑한 내용이라서 나는 가짜뉴스겠지 생각하면서 외신을 점검했다. 한데, 놀랍게도 모두 다 서울의 비상계엄령 소식을 머리기사로 올렸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회의사당 안팎의 모습을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물음은 제3세계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라고 평가받는 한국에서 2024년에 이런 사건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였다.
무장한 군인이 의사당 안까지 난입한 숨가쁜 상황에서 비상계엄령을 반대한 야당 의원의 결연한 의지와 이들을 지킨 시민의 뜨거운 동참이 이번 정변 계획을 일단 좌절시켰다. 긴장의 시간 열흘 만에 탄핵안은 결국 국회를 통과했다.
뜬금없는 이번 서울발 비상계엄 소식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인물은 올해 9월 사망한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였다. 일본인 2세로서 농업기술을 전공했고 후에 대학 총장도 지낸 그는 1990년 선거에서 예상을 뒤집고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꺾고 승리했다.
그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도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이에 비판적인 의회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1992년 4월, 그는 군부를 동원해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언론 통제도 강화했다. 1993년 12월 신헌법을 발표해 재선의 가능성을 마련한 뒤 1995년 재선에 성공했다. 3선 금지조항을 비켜나가기 위한 ‘헌법해석법’까지 통과시켜 2000년 3선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독재적 발상과 행태는 결국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의 집권 10년 동안 자행된 반인권적 통치행위와 부정부패에 일거에 폭발한 민심으로 쫓겨난 그는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일본에서 팩스로 자신의 ‘사임’을 발표했으나 의회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영구한 도덕적 무능’을 선고하고 파면 결의를 했다. 2005년 말 재기를 노리고 칠레에 입국했으나 체포된 그는 2년 후 페루에 송환됐다. 그는 3년여의 재판 끝에 징역 25년형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올해 9월 사망했다.
권력의 정점이자 내리막 시작
물론 후지모리의 이 같은 쿠데타는 친위 쿠데타의 역사에서 전형으로 자주 이야기되는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남긴 유산과는 비교될 수 없다. 하지만 ‘후지모리주의’라는 정치적 유산의 지지자들은 이후에도 그의 딸 게이코의 대권 도전을 지원했다. 그녀는 세 번이나 결선투표까지 갔으나 근소한 표차로 패했다.
프랑스 혁명 후의 격변기에 유럽에서 ‘그랑드 나시옹’ 프랑스를 건설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를 거치면서 제1 총통이 되었고, 1805년에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812년 겨울 러시아 정복전쟁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락했다. 그는 2년 후 엘바섬으로 유배되었으나 한겨울을 나고 탈출, 파리로 돌아가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100일 천하’로 끝나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
40년 전 엘바섬에 들렀을 때 나는 나폴레옹이 유배 중에 기거했던 크지 않은 빌라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권력과 이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는 탈레랑(1754~1838·나폴레옹을 정계에 등장시켰으나 후에 그와 갈등을 겪었던, 유럽을 무대로 종횡무진 활동했던 외교관)의 말을 떠올렸다.
인류사의 큰 재앙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인 아돌프 히틀러도 이탈리아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처럼 1923년 뮌헨을 시작으로 해서 베를린 진군을 기획했으나 실패, 의회 진출을 통해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길을 택했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막대한 배상금 때문에 허덕이던 독일은 1929년 대공황 발생으로 갈등과 혼돈의 수렁에 빠졌다.
이는 히틀러에게는 하나의 기회였다. 그가 이끈 나치당은 1932년 의회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제1당이 되었고 그는 1933년 총리가 되었다.
공산당이 베를린 의회 건물에 방화했다는 것을 구실로 총리에게 전권을 위임하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켜 친위대를 동원,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비판세력을 제거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1934년 8월 사망하자 그는 곧 총리와 대통령의 지위를 통합한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1인 통치체제를 철저히 구축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고속도로(아우토반) 건설과 같은 대규모 공공투자를 통해 실업자를 구제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수산업의 확충에 힘을 쏟았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보여준 가시적 성과 덕에 그는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39년 9월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결국 6년 동안 6500만명이 희생된 인류사의 최대 비극을 낳았고, 1945년 4월30일 그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완전히 포위한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자살했다.
이미 지닌 권력을 바탕으로 더 많은, 더 완전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15년, 히틀러는 12년, 후지모리는 10년 권좌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친위 쿠데타의 성공은 권력의 정점이자 동시에 이의 내리막의 시작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의 기치인 공화주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한 나폴레옹을 흠모한 베토벤이 원래 교향곡 3번 <영웅>을 그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악보에서 보나파르트를 지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해 즉결처분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도 젊은 시절 히틀러를 독일 민족을 구원할 진정한 지도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2차 대전 발발 이후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반나치주의자가 되었다.
‘정직, 기술, 노동’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집권에 성공한 후지모리는 긴축재정을 통해 경제분야에서 이룬 성과와 ‘빛나는 길’(Sendero Luminoso)이라는 좌익 게릴라 소탕 등으로 일정한 정도 구축했던 지지 세력도 계속된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로 그에게 등을 돌렸다.
지금도 안심할 상황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1972년 유신체제의 출범과 몰락에서도 친위 쿠데타의 궤적을 볼 수 있다. 7년 동안 유지된 유신체제는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의 총성과 더불어 일단 끝났지만, 다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1980년 5월 유혈 쿠데타로 연결되어 반동의 시대는 적어도 1987년 6월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하룻밤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장한 군인들이 의사당 안으로 난입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세계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페루처럼 거의 내전 수준의 정부군과 게릴라 사이 전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고 비상계엄을 선포했으니 어떻게 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비상계엄 선언, 국회의 해제 요구 결의안 통과 그리고 이에 따른 해제까지 6시간이 걸렸으니 이번 친위 쿠데타는 실패한 쿠데타임은 물론이고, 단명한 것으로도 기네스북에 오를 것 같다. 가장 짧은 시간에 성공한 쿠데타로는 41년 동안 지속한 살라자르 독재체제를 시작 6시간 만에 무너뜨린, 1974년 4월25일 있었던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을 꼽는다. 이 무혈 혁명은 국민의 절대적 지지 때문에 그렇게 빨리 성공할 수 있었지만,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시민의 저항으로 그렇게 빨리 실패로 끝났다.
탄핵에 이어 내란죄의 우두머리로 윤석열은 이제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가 내린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니라 통치 행위에 속하고, 지금은 분노하고 있지만, 국민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결단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지금의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안심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스 신화에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가 나온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그 자리에서 곧 두 개의 머리가 나오는 괴물이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잘려나간 목 부분을 횃불로 지져서 새로운 머리가 나올 수 없게 만들었으나 한가운데 있는 머리는 죽지 않아서 거대한 바위로 짓눌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히드라와의 싸움에 수많은 헤라클레스가 횃불 대신 스마트폰 불빛을 들었다고 믿는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2024.12.25 경향신문)
< 3 >
‘87년 체제’ 한계 뛰어넘어야
1987년 6월 항쟁으로 만들어진 민주 헌정 체제를 ‘87년 체제’라고 한다. 여야 간의 타협으로 직선제 부활을 포함한 선거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구성한 ‘87년 체제’는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으론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선거민주주의라는 ‘그릇’을 만든 사건이었지만, 그 정치적 그릇에 담긴 내용은 한계가 분명했다.
그 한계는, 지난 40년 동안 꾸준히 진행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나타났다. 기초 지표에 해당하는 지니계수, 자산소득 대 노동소득의 비율, 상위 1%의 소득 비중, 상위 1%의 부동산 비중 등 모든 지표에서 격차 확대와 양극화가 뚜렷해졌다. 예컨대 1987년과 2023년에 상위 1%가 보유하는 부동산의 비중을 비교해 보면, 1987년에는 약 30%였고, 2023년에는 50%로 크게 증가했다. S 해거드와 S 카우프만은 현대 세계의 민주주의의 후퇴를 16개국 사례를 통해 분석한 책 <백슬라이딩(역행)>(2021)에서, ‘양극화의 치명적 효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의 확대가 정치적 극단화를 초래하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속화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양극화의 치명적 효과는 사회적 분리의 고착, 그리고 사회적 병목현상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교육을 중심으로 보면, 단적으로 부모 세대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자녀 세대의 학력 격차로 이어지는 구조가 고착됐다. 이 대표적인 통로가 바로 ‘사교육’이다. 지금의 사교육 산업은 수능 등 입시평가가 요구하는 지식과 역량을 학생 맞춤형으로 만들어 낸다. ‘시험 기반 한국형 능력주의’는 이를 공정한 것으로 믿게 한다. 이 과정에서 중하위계층 자녀의 좋은 재능들은 충분히 계발되지 않는 반면, 중산층 이상 계층 자녀는 과열 경쟁 속에서 문제풀이식 사교육 의존이 심화돼 스스로 공부하는 힘과 창의 역량을 기르지 못한다.
결국 사회 전체에서 동맥경화가 생겨난다. 나는 교육감으로 재직하며 매년 초중고의 ‘배정 갈등’을 경험했다. 안타깝게 반복되는 사례는, 중산층 이상 계층 학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가 임대아파트 등에 거주하는 중하위계층 자녀와 같은 교실에서 어울리기를 기피하는 경우였다. 해방 이후의 역사에서 학교 교실은 사회통합을 위한 용광로 같은 역할을 해 왔는데, 사회경제적 격차 확대와 함께 교실을 오히려 계급계층 분리의 현장으로 만드는 압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교육이 희망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절망이 되어, 부동산 문제와 함께 세계 최고의 저출생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촉진하는 악순환이 나타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저출생의 핵심 요인은 부동산과 교육이다. 저출생의 위기는, 젊은 세대가 지난 민주화 40년에 이르는 동안 악화되어 온 거대한 경제적 양극화와 그와 결합된 사회적 병목들에 대한 좌절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낮은 출산율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빚어진 ‘정치적 그릇’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이며, 87년형 민주정이 실질적인 공화정으로서는 균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희연 / 전 서울시교육감
(2025.1.3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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