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 ‘생애주기’를 창안하라!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志于學), 서른에 자립하고(而立), 마흔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不惑). 오십에는 천명을 알고(知天命), 육십에는 귀가 순해지며(耳順), 칠십이 되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欲不踰矩). 주지하듯, 공자가 구현한 생애주기다. 그런가 하면, 이런 생애주기도 있다. 학습기(스승을 찾아 베다의 진리를 배우는 시기), 가주기(결혼과 직업을 통해 사회적 다르마(의무)를 실행하는 시기), 임서기(숲으로 가서 명상과 성찰에 들어가는 시기), 유랑기(천하를 유행하며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 이것은 아슈라마, 곧 인도의 힌두교가 제시하는 생애주기다. 공자와 힌두교 모두 BC 5세기 전후에 등장한 영적 비전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인간의 기본수명은 125세다. 오행(목화토금수)에 25를 곱해서 나온 숫자다. 생물학적으로 추산해도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과 자연재해, 역병 등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오랫동안 50세 안팎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100세 시대가 도래하였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기대수명이 100세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대단한 축복이자 행운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사이에 생애주기에 대한 비전이 증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100세 시대와 관련한 담론들이 넘쳐나긴 한다. 고령화(및 그에 수반되는 저출산), 노인일자리 및 연금제도, 요양과 돌봄 등등. 이런 담론을 접하다 보면 노인이 된다는 건 그 자체로 ‘스트레스’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잘 관리되고 처리되어야 하는 “잉여인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참 허탈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모든 기술적 혜택을 번뇌로 만드는 ‘문명의 아이러니’가 또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과 화폐라는 기준이 생애주기 전반을 다 관통하기 때문이다.
찬찬히 따져보자. 공자의 생애주기나 힌두교의 아슈라마가 보여주듯, 우리 시대 역시 청년기는 배움의 시기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인생의 기본기, 즉 생로병사 전체를 헤쳐나갈 수 있는 인식의 지도를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교육은 노동을 위한 예비기간이다. 아니, 학습 자체가 이미 노동이다. 그럼에도 ‘서른에 자립하기’란 요원하다. 사회적 다르마를 실행하기는커녕 경제적 자립조차 어렵다. 그러니 마흔에는 불혹은커녕 노동과 화폐에 완전히 미혹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50 전후해서 퇴사하거나 명퇴를 한다. 이때부터는 생의 변곡점이다. ‘지천명’이나 ‘숲속의 명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생리적으로도 갱년기, 즉 리셋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지만 기준은 여전히 노동과 화폐다. 다가오는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에 더더욱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니 환갑 이후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청력이 급격히 저하된다. 들리는 모든 것이 못마땅해진다. 혹은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청춘을 모방하는 데 골몰한다. 하여, 다시 돈이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천지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공자의 ‘일흔’이나 해탈을 향해 천하를 떠도는 ‘유행기’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오직 노동! 오직 화폐!’의 깃발이 주도하는 일직선의 평면 위를 달리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공간은 직선도, 평면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이 끊임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물질은 공간을 휘어지게 하고, 공간은 다시 물질을 운동하게 하는’ 식으로.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이것을 일러 ‘우주의 탱고’라 이름했다. 하여, 그 매트릭스에선 인생 또한 사계절과 더불어 리듬을 탄다. 봄여름에 발산하고 가을겨울에 수렴한다. 전자가 성장과 확충의 때라면, 후자는 교감과 성찰의 시간이다. 전자가 열정과 모험의 장이라면, 후자는 지혜와 유머로 충만해야 할 때다. 공자의 생애주기나 힌두교의 아슈라마도 이런 ‘우주적 리듬’의 표현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시대 역시 100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애주기를 창안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이런 리듬 속에서만이 청년과 노년은 비로소 서로에게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인생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벗! ‘청년기의 고립’ 혹은 ‘노년기의 단절’이라는 시대적 난제를 극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다!
고미숙 / 고전평론가
(2024.9.23 경향신문)
< 2 >
신고가를 꿈꾸는 패닉바잉의 나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래미안원베일리는 최근 ‘국민평형(국평)’으로 통하는 전용면적 84㎡ 한 가구가 60억원에 팔렸다. 연 5300만원대(2022년 기준)인 중위소득 가구가 평생 모아도 살아생전에 사기 어려운 가격이다. 올해 서울에서 거래된 국평 아파트 거래가격 상위 10개 중 7개가 이 아파트 단지에서 나왔고, 2개는 이 아파트 옆의 아크로리버파크, 나머지 하나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나왔다. (...생략...)
지방의 부동산 경기는 딴판이다. 서울 아파트 매매가가 반년 넘게 쭉 오르는 동안 지방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 주택 1만6000여가구 중 80% 이상이 지방에 몰려 있다. 빈집이 남아돈다.
서울 쏠림, 서울 내에서도 소위 ‘똘똘한 한 채’로 몰리는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더 심해질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지방 대도시마다 자산가들이 몰리는 인기 동네가 하나씩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강남3구와 마용성으로 몰려 지방의 모든 곳이 공동화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생략...)
사람들이 왜 신고가 지역으로 몰리고 ‘똘똘한 한 채’를 선호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단편적, 단기적 해법에 치우쳐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고속철도 타고 강남까지 한 번에 오갈 수 있다.” 지방에서 SRT 개통식이 열릴 때마다 등장하는 홍보 문구다. 서울 강남 수서로 향하는 고속철도 SRT 운행은 모든 지방의 숙원사업이다. 순천에서, 남원에서, 진주에서 SRT를 타고 강남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인근의 대형종합병원, 유명 입시학원, 문화시설들이다. 좋은 의료시설, 상위권 대학 진학률을 높여주는 학원, 양질의 일자리,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찾아 강남으로 몰려드는 수요를 분산시키지 않고선 서울 주변의 그린벨트를 다 풀어 아파트로 채우더라도 서울 집값 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긴 어렵다. (...생략...)
집값 급등과 양극화는 경제 성장을 좀먹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저 수준인 출생률과도 직결된다. 결혼을 하고도 자녀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가 한국 사회에선 너무나도 많겠지만, 세계 주요 도시들과 비교해도 너무나 높은 집값은 무시 못할 요인이다. 강남3구와 마용성에 쏠린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선 지방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노동의욕을 잃게 만드는 양극화, 모든 기회와 가능성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구조적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영끌과 패닉바잉은 반복될 것이다.
이주영 / 경제부문장
(2024.9.23. 경향신문)
* 패닉바잉이란 패닉에 빠져 가격에 상관없이 물자를 과다 구매하는 매점 ・ 매석 현상이다. 사재기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예측해 구매하는 현상이라면, 패닉바잉은 전쟁이나 전염병 등 예측 불가한 상황과 공포 속에서 과소비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국내의 경우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전쟁 공포로 생필품을 패닉바잉한 사례가 있으며 코로나19로 전 세계적으로 생필품을 패닉바잉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 3 >
요즘 가부장제, 영화 ‘장손’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1인 가구 시대, 장손(長孫)은 실재하는가.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인가. 가부장제는 누구에 의해 유지되는가. 쇠락하는 가부장제는 왜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생략...)
공식적인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경상도 지역 어느 마을, 3대 대가족이 모두 모인 제삿날 일가의 명줄이 달린 가업 두부 공장 운영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와중, 장손 ‘성진’은 그 은혜로운 밥줄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맞닥뜨린 예기치 못한 이별로 가족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는데…핏줄과 밥줄로 얽힌 대가족의 70년 묵은 비밀이 서서히 밝혀진다!” (...생략...).
두부 공장은 “은혜로운” 가업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장손은 도시에서 출세해야 하는 존재지, ‘시골에서 두부 공장을 맡아야 할’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두부 공장은 이 가족의 생계 수단일 뿐이다. 일본 문화에서처럼 대대로 이어져온 자랑스러운 가업이 아니다. 할아버지는 아들(2대 장손)이 ‘판사’가 되려면 두부 공장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김씨가 아닌 사위에게 물려주기도 싫다. 3대 장손인 성진의 어머니도 이렇게 말한다. “너는 서울 가서 승부를 봐라, 두부 공장하라고 공부시킨 거 아니다.”
영화는 제례와 상례가 중요한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제를 다루지만, 동시에 유교적 가부장제가 얼마나 속물적이고 비인간적인가를 보여준다. 아들들에게는 두부 공장에서 나온 수익으로 ‘출세’를 지원하고, 딸들에게는 아들들이 하기 싫어하는 가업을 맡기면서도 그녀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거나 이름을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 일은 시키면서도 일하는 사람을 혐오하는, 여성에 대한 이중 메시지를 표현해낸 감독의 통찰이 돋보인다.(...생략...).
더불어 흥미로운 사실은 딸들은 철저히 출가외인 취급을 받지만, 이 집안을 유지하는 모든 노동은 여성이 한다는 것이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공적인 일인 두부 공장 노동도 여성의 몫이고, 할머니의 존재는 <장손>을 끌고 가는 동력이다. 가부장제는 남성 중심 사회지만, 그 체제 유지에 필요한 노동은 여성이 한다. 가부장제를 실제로 유지, 작동시키는 이들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분열적인 위치에 놓인다. 부역하면서도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일부 남성들을 위한 체제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규범을 임의적으로 만든다. (...생략...).
이들 세 남성은 돈 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장손이라는 무게 혹은 의무, 권리만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일부(?) 남성들은 “남자도 (무게와 기대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다.
가족과 두부의 공통점이 있다. 만들기 힘들며, 잘 부서지고, 잘 상하고, 또 상했을 때는 냄새가 고약하다.
정희진 /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2024.9.25 경향신문)
< 4 >
우리는 정말 공공의료를 원하는가
2024년 8월23일 소방공무원 노동조합원들이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환자 수용 거부, 생명을 지우는 선택”이라는 플래카드 앞에 선 이들은 ‘응급실 뺑뺑이’를 돌며 절규해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소개했다. 7월30일 서울의 한 편의점에서 쓰러졌던 40대 응급환자가 14곳의 병원에서 수용 거부를 당하고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고, 바로 다음날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환자 역시 10여곳의 병원에서 수용을 거부당하고 사망에 이르렀다. 그들은 지금의 의·정 갈등 이전부터 응급실 뺑뺑이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음을 지적하며, 시급히 응급환자 이송 시스템의 개선을 촉구했다. (...생략...)
<의료비지니스의 시대> 저자 김현아 교수(한림대성심병원 류마티스 내과)는 지금의 응급실 사태에 대해 “우리는 정말 공공의료를 원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모든 사태 이전에 한국은 벌써 공공병원보다는 이윤을 창출하는 민간병원이 의료의 중심이 된 지 오래됐음을 지적한다. 단적으로 코로나19 사태 당시 공공병원 병상 수가 OECD 최저 수준이었던 반면, 2022년 기준 사립병원 병상 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한국의 병원 90% 이상이 민간병원이 될 때까지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내왔고 앞으로 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생략...)
김관욱 /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2024.10.1. 경향신문)
< 5 >
지금이 청소년 정신건강 개혁의 골든타임이다
지난달 26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아동·청소년 자살 통계가 발표됐다. 초중고생 자살자 수는 2014년 한 해 118명에서 2023년엔 214명으로 10년 새 81% 늘었다. 이 중 초등학생은 같은 기간 7명에서 15명으로 114%, 중학생은 28명에서 93명으로 232% 급증했다. 고등학생은 83명에서 106명으로 28% 증가했다. 자살을 생각하는 연령이 낮아지고 특히 초등학생 때부터 죽음을 생각할 만큼 삶이 힘들다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지난달 30일 공개된 또 다른 자료도 눈여겨봐야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밝힌 ‘아동·청소년 우울 및 불안장애 현황’을 보면, 지난해 우울증 진료를 받은 아동·청소년은 5만3070명으로 2018년 3만190명과 비교해 75.8% 증가했으며, 불안장애 진료를 받은 아이들도 같은 기간 93.1% 늘었다. 불안과 우울을 겪는 아동·청소년 중 그 숫자가 더 도드라지게 증가한 연령대는 초등학생에 속하는 7~12세였다. 2023년 우울증 진료를 받은 초등학생은 5345명으로 5년 전인 2018년의 2499명보다 113.9% 증가했고, 불안장애 진료를 받은 초등학생도 같은 기간 136.6% 증가했다.
이뿐만 아니다. 몸에 상처를 내는 자해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지난 6월 발표한 의도성 자해 청소년 환자의 치료비율은 10년 새 2.3배 늘었다. 남성보다 여성 청소년이 3배 이상이다.
자해와 자살 충동이 아동·청소년에게 흔한 일이 된 대위기 시대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무얼 하고 있는가? 교육부와 복지부, 여가부 등 관련 부처가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정책이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한숨만 나온다. 교육부는 디지털 교과서에 예산을 올인하고, 복지부는 진료할 의사들을 없애고, 여가부는 폐지가 예고된 부서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아동·청소년의 자해, 자살, 우울과 불안의 원인으로 알려진 이유들은 정신건강 문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중독, 학업 스트레스, 고립과 외로움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실제 효력을 발휘할 대담한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지속되는 아이들 마음의 위기는 더 깊은 상처와 함께 깊은 늪에 빠지는 형국이다. 결국 무기력하거나 중독에 빠지는 아이들이 대거 늘어나고, 등교하지 않는 초등학생들, 은둔하는 청소년들도 대폭 늘어서 일본이 겪은 고통스러운 하류사회 입구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두렵다.
지난해 10월 미국 33개 주(州)정부는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를 상대로 공동 소송을 제기했다. “(메타가) 청소년의 강박적 사용을 유도하기 위해 심리조작 기능을 설계했다”는 것이다. 메타를 상대로 자살, 자해 및 우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진 SNS 중독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한 것이다. 그 결과, 지난달 17일 특단의 정책이 발표됐다. 인스타그램 10대 접속자들에게는 자극적 방식의 알고리즘이 폐지되고, 1시간마다 알림이 울리고, 비공개 설정을 기본으로 했다.
어른들 모두가 나서서 죽음의 골짜기를 찾는 아동·청소년을 구해야 한다. 모든 학교가 마음 관련 수업을 하게 하고, 상담사를 대거 채용해야 하며, 학교 자문의 파견 및 방문이 더 잦아야 한다. 또한 패스트 트랙 진료와 함께 마음돌봄의 실질적이고 파격적인 정책이 가동돼야 한다. 대만의 정신건강 휴식, 호주의 마음수업, 유럽의 갭이어(Gap year·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등의 경험을 쌓고 진로를 탐색하는 기간) 정책 등 대담하고 실질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불안, 우울, 자해는 질병이면서 동시에 신호다. 외로움, 존재감, 부담감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아동·청소년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공부한 다음에 마음을 돌보라고 하지 말라. 지금이 바로 학교 건강 및 정신건강 개혁의 골든타임이다.
김현수 /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2024.10.2. 경향신문)
<6 >
‘초등의대반’ 방지법
(...생략...)
선행학습금지법을 업그레이드한 ‘초등의대반 방지법안’이 지난달 30일 발의됐다. 교육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강경숙 조국혁신당 의원 등이 주도했다. ‘초등메디컬반’ ‘초등M클래스’로도 불리는 초등의대반은 의대 정원이 확대되면서 올 초부터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초등학생에게 4~5년을 앞질러 미적분은 물론이고 가우스함수와 행렬식까지 가르친다. 심지어 ‘유아의대반’ ‘태교의대반’까지 나오고 있다. 초등의대반 방지법안은 이런 반교육적인 학원들에 1년 이하의 교습 정지를 명령하고 최고 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조항을 담았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이 법안이 규제 수단의 적합성, 침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 등의 측면에서 정당하다는 의견을 냈다. 복잡다단한 문제가 법 하나로 해결될 리는 만무하지만 ‘선’을 넘은 사교육에 최소한의 견제 장치는 둬야 한다.
오창민 / 논설위원(2024.10.2 경향신문)
< 7 >
네포티즘의 시대
(...생략...)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적인 것들이 은둔처 밖으로 나와 공적인 역할을 떠맡을 때, 공통의 세계를 직접 파괴하고 공적인 활동에 필요한 객관적 거리를 지운다는 점에서 어디서나 타락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사적인 것이 은둔처 밖으로 나와 공적인 역할을 떠맡는 일을 ‘네포티즘’(nepotism)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연고주의’ 혹은 ‘족벌주의’라고 옮기는데, 권력자가 혈연, 지연, 학연으로 맺어진 가까운 이들에게 주요 관직을 나눠 주는 일을 말한다.
이 용어는 라틴어로 조카를 의미하는 ‘nepos’(네포스)에서 나왔는데, 교회의 율법에 따라 자식을 가질 수 없던 가톨릭 교황이나 대주교가 조카들에게 고위 공직을 나눠주는 관행에서 유래한 용어다. 심지어 부패로 악명 높은 알렉산더 6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조카’로 둔갑시켜 각각 공작과 대주교에 임명하기도 했다. 이 사례는 네포티즘이 ‘뻔히 보이는 거짓’, 뻔뻔함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네포티즘’으로 만연한 국가가 되었다. 검찰, 서울대, 대통령 친구 출신이 나라의 주요 행정 공직을 장악했다. 행정부뿐만이 아니다.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다. 대법원장 후보에 올랐다 낙마한 이는 대통령과의 인연을 “제 친한 친구의 친한 친구”라고 답하기도 했다.
더 어이없는 건 그 네포티즘의 수준이다. 얼마 전 폭로된 김대남 녹취록에선 이 정권의 실세들이 대통령의 ‘술친구’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 여러 언론이 실세로 대통령의 술친구를 언급해 왔다.
(...생략...)
‘네포티즘’을 통제하는 데 핵심은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족, 특히 배우자를 통제하는 일이다. 2년이 넘도록 이 정권의 진짜 권력은 여사라는 말이 이어져 왔다. 명태균의 대통령 탄핵 협박도, 새로운 십상시 논란도 모두 여사와 이어져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아무 조치도 못하고 있다.
“내가 정권 잡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던 여사의 사적 욕망이, 아렌트의 표현처럼 ‘공적 세계를 파괴하고 가는 곳마다 타락을 낳고 있다.’
김만권 / 정치철학자
(2024.10.14 경향신문)
< 8 >
도시의 밤
밤이 되어도 도시는 잠들지 않고, 더더욱 화려하게 변신을 합니다. 혹 유행에 뒤처질까, 혹 현실감각에 뒤떨어질까, 혹 혹시나 좋은 일이 생길까? 큰맘 먹고 화려한 도시로 외출을 해봅니다.
활기찬 젊음과, 다양한 인종들, 맛있는 먹거리와, 화려하고 개성 있는 패션들이 나의 잠자고 있던 감각을 일깨워 줍니다. 예전처럼 밤새도록 이 도시를 즐기고 싶었지만, 내려오는 눈꺼풀과 한껏 벌어지는 하품으로 나의 현실을 깨닫습니다. 덜컹거리는 막차를 타고 내일의 하루를 생각하며 다시 집으로 향해 봅니다.
김상민 / 기자
(2024.10.15 경향신문)
< 9 >
고독(蠱毒)이라는 저주
외롭다는 뜻의 ‘고독’이 아니다. 배 속 벌레 고 자와 독약이라고 할 때의 독 자를 합쳐 ‘고독’이라고 불리는 저주다. 글자 생김으로 뜻을 따져보면 고(蠱) 자는 그릇(皿)에 담긴 벌레를 의미하니, 고독은 이를 이용한 저주를 뜻한다.
저주의 방법은 이러하다. 항아리 안에 여러 종류의 독충이나 파충류를 한데 모아 봉한 다음 그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게 한다. 다음 해에 개봉을 했을 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한 마리를 태워 가루로 만든다. 이 가루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음식이나 술에 넣으면, 그 사람이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혹은 이 항아리에서 혼자 살아남은 생물을 ‘고’라 하는데, 신을 섬기듯이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 음식에 독을 방출한다고도 한다. 고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동물은 매우 다양했다. 뱀을 써서 만들면 사고, 고양이를 쓰면 묘고, 개를 쓰면 견고라고 했다. 중국 고대부터 전해진 이 고독은 조선시대에는 사면령 대상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잔혹한 저주로 여겨졌다.(...생략...)
이러한 주술에 대한 논문과 기록을 심드렁히 보다가 문득 소름이 돋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이 고독을 만드는 항아리와 다를 바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한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압박하지 않는가. 어느새 그 압박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경쟁을 찬양하고 승리와 생존만이 최상의 가치라고 칭송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가치관을 내면화하고서,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며 그 어떤 불법도, 부도덕한 행위도 저지르는 데 거리낌이 없고, 약자를 돌보는 것은 위선이라고 비난하며, 타인을 눌러 이길 수 있는 더 큰 힘만을 갈망하고 있지 않은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세계관이 팽배한 세상, 이것이 고독을 만들기 위한 그 항아리와 다를 것이 무엇일까. (...생략...)
장지연 /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2024.10.17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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