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칼럼, 정의

아아, 光州여!

송담(松潭) 2021. 5. 19. 06:09

 

 

 

아아, 光州여!

 

金 準 泰

 

 

 

아아, 光州여 무등산이여

우리들의 영원한 靑春의 都市여

 

아아, 우리들의 都市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罪人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나는 또 당신의 全部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아아, 光州여 무등산이여

白衣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靑春의 都市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이 나라와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저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 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더욱 젊어갈 靑春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 詩人 전남고 교사 >

 

 

위 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에서 옮겨 적은 것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치안부재로 신문발간이 일시 중지되었다가

진압군이 시민군을 접수한후 첫 발간된 신문이며

 

이 신문은 발간 배포되자마자 진실을 거침없이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당시 군부의 지시에 의해 회수, 폐기되었고

 

저 역시 음성적 루트에서 입수하여 누렇게 빛바랜 신문을

지금까지 서랍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리지 못하였지만

의식은 공유하고 싶습니다.

 

위 시 중에서 저가 줄곧 기억하고 있는 귀절은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오월의 광주

 

 

 오월이다. 신록의 계절, 한 송이 꽃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입 맞추고 싶은 아름다운 오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있어 가정의 달이라고도 불리는 오월. 그러나 1980년 광주에서의 5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항쟁 현장인 금남로의 경우,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쓰러진 총상환자를 둘러메고 산부인과까지 달려 들어가 응급치료를 해야 했던 오월이었다.

 

 일부 군인들이 정권탈취에 눈이 멀어 쿠데타를 일으킨 후 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광주에 진입, 이에 항거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1만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연행·구금·구속시켰다. 광주뿐이었으랴. 계엄령을 선포한 신군부는 이미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줄줄이 예비검속한 터였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운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고 일어선다. 마침내 학살을 자행하여 정권을 거머쥔 전직 두 대통령(전두환·노태우)에게 죄수복을 입혀 법정에 서게 만든다. 군사정권을 끝내고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 등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권을 창출하는 역사적 전통을 세운다.

 

 1980년 오월항쟁 당시 광주는 어쩌면 파스카’(집집마다 대문에 피를 묻혀 사전에 죽음을 막는)의 기적을 앞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광주시민 모두가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외친 금남로는 520~21, 20만명 이상의 시민들로 넘실거린다. 계엄군에게 무자비하게 봉쇄된 광주, 그러나 시민들은 서로를 보듬고 전진하면서 대동세상, 운명적인 시민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시민들은 공동선(共同善), 개인보다는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의 피어린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의 저 거대한 산을 넘어가고 있었던 것 아닌가.

 

 1980513일 밤. 이미 31사단 병력을 투입시킨 신군부는 18, 특전사 7여단 686명 병력을 전남대·조선대 교정에 쏟아붓는다. 박달나무 곤봉과 총칼로 충정작전-‘화려한 휴가를 개시한다. 518일 오후에 병력 258명을 추가 투입한 특전사 11여단은 19일 자정께 1146명을 광주에 증파한다. 20일 새벽엔 특전사 제3여단 병력을 증파, 3405명의 병력을 진주시킨다. 20사단 병력들은 열차와 군용비행기로 공수된다. 병력 현황은 장교 284, 사병 4482명으로 총 4766명이란 어마어마한 숫자다. 대략 2만여명의 병력이 10일 동안 광주 시위현장에 투입된 셈이다. 당시 광주 인구는 80만명이었는데, 40명당 한 명 꼴로 완전 무장한 전투병력이 달라붙은 것이다. 하늘에서는 베트남전쟁에서 맹위를 떨친 무장헬기 건십을 비롯해 코브라, 올챙이헬기, CH47, F5전투기가 날고 있었고.

 

 그러나 오월 광주의 금남로는 사랑이었다/ 우리가 노래와 평화에/ 눈을 뜬 봄날의 언덕이었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알아낸 거리/ 금남로의 사람들은 모두 보리피리를 불고 있었다”. (금남로 사랑에서)

 

 그랬다. 오월의 광주는 하나였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봉쇄작전 속에서도 서로 나눠 먹고, 서로 나눠 울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민들은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불렀다. , 어쩌면 길가의 쓰레기통마저 사람처럼 울었던 1980년 오월의 광주! 다시 일어서는 광주에서 환희를 발견한 나는 다음처럼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는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동녘 하늘 뭉게구름 위에/ 앉아 계시는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그런 뒤로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었고/ 세상사람들 누구나가 좋아졌다/ 내 몸뚱이가 능금처럼 붉어지고/ 사람들이 이쁘고 환장하게 좋았다/ 이 숨길 수 없는 환희의 순간/ 세상사람들 누구나 보듬고/ 첫날밤처럼 씩씩거려주고 싶어졌다/ 아아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김준태 / 조선대교수, 5.18기념재단 이사장

(2011.5.18.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