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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뮤지컬, 해밀턴의 세계

송담(松潭) 2021. 11. 8. 05:50

놀라운 뮤지컬, 해밀턴의 세계

 

 

카리브해 섬 출신의 마이너리티 소년 이야기로 미국이 들썩거렸다. 건국 초기부터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건 신생 아메리카에서 차별을 딛고 일어선 주인공,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다. 촘촘한 유럽 주류사회 이민자 사이의 엄연한 격차도 피부색부터 다른 소년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서인도제도 설탕 섬, 세인트 크루아 S. Croix 의 사생아라는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 13살 때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그는 동네 유지들이 마련해준 노잣돈으로 뉴욕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공부보다 정치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해밀턴은 재학 중 아메리카 독립군에 입대해 미국을 위해 싸웠다. 이때 조지 워싱턴 장군을 만났다. 인생의 대반전이었다. 그의 부관으로 발탁되어 미국 독립을 목격했고, 초대 정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정 시스템이 바탕이 되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설계한 주인공이 된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개 단정한 뉴잉글랜드 마을 가정에서 자랐거나 버지니아 사유지에서 애지중지 길러진 이들이다. 해밀턴만은 예외였다. 초대 정부 요인 가운데 신분이 가장 낮아 스코틀랜드 행상(아버지)의 사생아라는 놀림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뛰어난 지혜와 인내, 노력, 담대함으로 조롱과 비난을 넘어섰다. 오늘날까지 미국 역사 속에 우뚝 서 있는 이유다.

 

그러한 해밀턴의 일생이 글로벌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뉴욕 브로드웨이 리처드 로저스 극장 앞은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뮤지컬 〈해밀턴>을 보기 위해서다. 100만 원에 육박하는 티켓은 1년 전부터 매진이고 당일 암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였지만 관객들은 로저스 근처로 몰려 움직이지 않았다. 세계적인 전기 작가 론 처노 Rom Chernow의 역작이 된 『알렉산더 해밀턴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해밀턴은 정치와 정부와 국가를 이어가기 위해서 어떤 희생과 타협, 양보가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미국 역사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건국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을만한 요소가 가득했다. 게다가 2시간 넘는 공연이 모두 랩으로 짜여 있을 줄은 몰랐다. 가창력 넘치는 열창은 아예 없었다. 딱딱한 건국 초기의 정치 이야기를 이처럼 재미있고 어깨가 들썩거리는 공연으로 만든 연출가 린마누엘 미란다의 솜씨가 놀랍다. 랩과 힙합, 알앤비 스타일의 46개 삽입곡들은 현란했다. 주인공 해밀턴은 물론 워싱턴 대통령 역에 흑인 가수, 라파예트 역에 히스패닉 배우, 부인 엘리자베스 역도 흑인 연극 스타로 주연급 대부분이 유색인종이다. 아시안과 중동 출신도 기용되었다. 다양한 인종이 빚어내는 에너지와 하모니는 강렬했다. 맨해튼을 걷다 만났을 법한 소수인종들이 아메리카 이민사의 스펙트럼을 유감없이 선사해주는 느낌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임 당시 출연진 전원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앞뜰에서 해밀턴 야외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퇴임 이후에도 2번이나 이 극장을 다시 찾았다. 얼마 전에는 부인 미셸 여사를 옆자리에 태우고 직접 운전해 다시 공연을 관람했다. 오바마 자신의 정치철학 일부는 알렉산더 해밀턴에게서 이어받은 타협과 양보였음을 몇 번이나 고백했었다. 상식을 뒤엎는 자유로운 캐스팅, 랩으로 이어지는 빠른 구성, 임팩트 넘치는 신선한 노래들, 배우들이 직접 무대를 바꿔가면서 쉴 사이 없이 전개되는 템포감, 진지함과 코믹이 적당히 버무려진 유쾌함이 관통하는 걸작이다. 육중한 체구의 흑인 주인공 '해밀턴'이 구성지게 불러대는 랩 음악은 관객들의 어깨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브로드웨이는 그동안 수많은 뮤지컬을 쏟아냈다. <미스 사이공〉, 〈맘마미아〉,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등 세계적 대작부터 수천 편이 무대에 올려졌다. 그 가운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무는 슈퍼 뮤지컬들의 계보를 지금 해밀턴이 바꾸는 중이다. 갈등과 대결과 음모가 춤추는 정치 무대에서 양보와 화해, 타협, 희생을 이끌어내는 주인공의 사람 냄새 때문에 사람들은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세상살이 어느 곳이나 갈등과 증오, 대립과 음모가 가득하지만 결국 스스로 극한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게 순리적인 이치다. 언제나 구성원 자신들이 마지막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나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공동체의 미래는 밝다. 이 어지러운 정치 혼란기에 미국인들은 해밀턴을 250년 만에 불러내 향수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권력 헤게모니 싸움, 갈등과 통합의 회전목마는 여전히 유효한 쳇바퀴다.

 

현직 부통령 애런 버의 총탄에 쓰러진 해밀턴은 49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미망인 엘리자베스 해밀턴은 이후 반세기를 더 살면서 7명의 자녀를 키워냈다. 오직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위대함을 가슴에 안고 버티면서 말이다. 후세인들은 꼿꼿했던 미망인의 삶에도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생전의 해밀턴은 메피스토텔레스(괴테의 작품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역)나 오만함과 야망, 고압적 성정이 혼재된 사악한 천재라는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대통령 출신 이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다. 오늘의 아메리카 리더들이 해밀턴의 일대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혁명을 예고했다는 점이다. 너그러울 때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해밀턴이 오랫동안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짧은 인생 전체를 마음의 주인으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례없는 갈등의 터널을 지나 정권이 바뀐 미국 백악관에서도 해밀턴은 조용한 변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트럼프가 떠나고 새로

운 지도자로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의 집무실에 토머스 제퍼슨 3대 대통령과 해밀턴의 사진을 나란히 걸도록 했다.

 

취임사에서 여러 차례 국민통합을 강조한 소신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두 사람은 건국 초기 중앙은행 설립을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이들 초상화를 같이 걸어놓음으로써 바이든 대통령은 서로 다른 의견을 배척하지 않고 조율해 나가겠다고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분석된다. 정치와 통합의 메시지는 때로 말보다 상징으로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정치 체계의 울타리 안에서 표현되는 상호 이견이 민주주의에 필수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두 사람은 역사의 증인으로 현직 대통령과 미국 민주주의를 지켜볼 것이다. 2달러 지폐의 주인공 제퍼슨과 10달러 지폐 해밀턴의 조화는 미국이 지향하는 통합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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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정치의 성인, 링컨

 

 

알래스카에는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 의 이름을 딴 항구 도시와 주州를 가로지르는 수어드 하이웨이, 고속도로가있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왜 수어드에 집착할까. 그 이유는 그가 알래스카를 사들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수어드는 재정 러시아에서 720만 달러(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약 70억 원)에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땅 천 평당 1원씩 주고 산 셈이다. 거대한 자원 보고를 미국 땅으로 만든 영웅이다. 정적 수어드를 국무장관으로 발탁한 사람은 바로 링컨이었다. 포용은 그를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기억하게 했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오벨리스크와 수평 광장으로 탁 트인 워싱턴 시가지는 한여름의 더위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위대한 역사적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을 추모하는 행렬은 링컨 기념관의 오르막 계단을 가득 메웠다. 뜨거운 오후의 태양 빛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아버지를 기념관에서나마 만나기 위해 방문객들은 긴 대열에서 인내하고 있었다. 추모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축제였다.

 

수어드는 링컨의 라이벌이었다. 1860년 당신 대선에서 공화당 내의 가장 강력한 상대였다. 학벌도 경력도 약한 링컨이 최종후보로 선출되어 대통령까지 올랐지만 초반에는 수어드가 압도적이었다. 파격은 당선 후 벌어졌다. 링컨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면서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었을 법한 정적 수어드를 국무장관으로 발탁했다. 전당대회에서 그를 켄터키 촌뜨기에 수준 이하 인간이라고 뭉개던 라이벌을 정부의 가장 중요한 보직에 앉힌 것이다. 측근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링컨은 그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기념관 옆쪽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인자한 모습, 다소 긴 물결머리에 덥수룩한 수염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좌상이다. 왼쪽에는 남북전쟁을 마치고 희생자들의 추도식에서 행한 게티즈버그 Gettysburg 연설 내용이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에서 자유가 새롭게 태동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정부는 이 땅 위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른쪽 벽으로 시선을 돌려 링컨의 감동적인 대통령 취임사를 몇 번이나 읽었다. 남북으로 갈라서고 백인과 노예로, 보수와 진보로 갈기갈기 찢긴 아메리카를 위해 비장하게 호소했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링컨 포용정치의 정점은 남북전쟁을 이끌 국방부 장관에 최고의 정적 스탠턴을 기용한 것이었다. 윌리엄 스탠턴은 같은 변호사 출신이면서 10여 년 동안 그를 끝없이 괴롭히고 비하한 원수지간이었다. 참모들의 극렬한 반대에 링컨은 “스탠턴 만한 인물을 데려오면 국방장관을 바꾸겠다” 라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혜안은 적중했다. 스탠턴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1865년 워싱턴 포드 극장에서 저격당한 링컨은 맞은편 가정집으로 급히 옮겨져 임시 보호되었다. 이때 링컨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사람은 스탠턴이었다. 다음날 링컨이 숨을 거둔 뒤 스탠턴은 눈물을 흘리며 “시대는 변하고 세상은 바뀐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온 역사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그 이름은 오래도록 영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링컨은 공화당 강경파들에 맞서 남군의 어떤 지휘관도 처벌하지 않았다. 모든 영광은 부하들에게, 책임은 항상 자신에게 있다는 자세를 지켰다. 보복보다는 화해가, 강요보다는 설득이, 비난보다는 칭찬이 공동체를 평화롭게 만든다는 신념의 결과였다. 44명의 대통령이 지나갔지만 생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은 링컨이 유일하다.

 

워싱턴을 떠나 명연설의 현장을 향했다. 펜실베이니아의 광활한 대지는 끝이 없어 보였다. 자동차로 2시간 만에 도착한 게티즈버그는 평온했다. 낮은 언덕으로 이어지는 전투지(배틀 필드)는 무성한 초록 속에 묻혀 있었다. 치열했던 전쟁은 끝났고 노예들은 해방되어 미국의 새로운 역사에 동참했다. 희생자들의 묘지를 만들고 민주주의 정부의 원리를 설파한 링컨의 추억만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았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나 북군의 조지 미드도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사방은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이다.

 

링컨은 150년 전 사람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포용과 협치는 빛나고 있다. 만델라가 따랐고 오바마가 택했다. 링컨의 길은 오늘날 모든 지도자에게 근본 물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적을 친구로 만들어야 평화롭다는 상생정신은 불멸의 진리다. 수어드나 스탠턴뿐만이 아니다. 체이스 재무장관도 야전사령관 맥클렐런 장군도 링컨을 죽도록 미워했지만 결국은 등용되어 승복했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여기에 링컨의 위대함이 있다. 그 위대한 협치를 한국에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김경한 / ‘인문 여행자, 도시를 걷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