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짜릿함 -
권태는 부부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정황이다. 연애와 신혼기의 달콤하고 뿌듯했던 순간들을 지나 배우자에 대한 신비감이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판에 박히고 습관적인 관계에 길들어간다. 영화 <밀애>에서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삶의 공허함에 시달리다가 동네의 어떤 의사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전업주부 미흔(김윤진 분)은 이렇게 토로한다. “삶이, 참을 수 없이 하찮아. 하찮아서 미칠 것 같아” 단지 심심하고 지루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인생이 너무나 시시하다고 느껴져 견딜 수 없다는 절규(?)에 공감하는 부부, 특히 주부들이 적지 않으리라. 그 남루한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없는가. 여기에서 또 다른 이성과의 만남은 극적인 반전을 일으켜 준다. 남편이나 아내, 아저씨나 아줌마가 아닌 한 명의 ‘여자’나 ‘남자’로 호명해 주는 목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 존재의 절대성을 일깨워 주는 시선과 손길에 홀연히 빨려든다.
갑갑하고 숨 막히는 현실, 짜증나고 한심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찾았지만, 막상 외출을 하고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바깥에 있는 길(外道)에 설레는 가슴으로 올랐지만, 목적지가 없는 것이다. 이성을 향한 욕망의 정체는 쉽게 규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외도는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어느 날 갑자기 마법에 걸려들 듯 시작된다. 찻잔 속에 태풍이 일어난다. 내 마음 한가운데 그 사람이 가득 들어차고, 그에 대한 애달픈 상념이 넝쿨처럼 뻗어 나간다. 누구도 그러한 충동에서 자유롭다고 안심하지 못한다. 제 아무리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나 거룩한 성직자도, 그리고 일편단심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남편이나 정숙한 아내도 장담할 수 없다.
연애와 불륜은 두 남녀 사이의 배타적인 관계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애틋하게 서로를 보살피고 끌어안아 주다가도 돌연 싸늘한 눈초리로 맞서는 감정의 기복 역시 닮은꼴이다. 그러나 불륜에서는 연애와 다른 속성이 있는데,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는 만남이라는 점이다. 연애에서도 초기에는 쉬쉬하는 경우가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개된다. “우리 사귀고 있어요” 주변에 선언하고 과시하고 축하를 받으면서 둘 사이의 연정은 더욱 농밀해진다. 그에 비해 불륜 남녀는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친구 몇 명에게나 겨우 털어놓을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만나는 밀회의 연속이다. 바로 그러한 비밀의 공유가 둘 사이의 결속을 돈독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떳떳한 연애와 달리 불륜은 그 자체에 근원적인 갈등과 분열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즉, 상대방에게 끌리면 끌릴수록 그 감정을 억제하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여야 하는 이유가 커진다.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수록 두려움도 커진다. 양심의 가책이나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만이 아니다. 만남의 미래상이 그려지지 않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작’이라는 시인의 통찰은 그래서 날카롭다. 관계의 저변에는 심히 불안정한 기류가 흐르게 되고,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 되어간다. 지금의 만남을 즐기면서도 하루빨리 이 갈등상황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소망이 함께 자라난다. 그래서 상대에 대한 호감이 조금만 식거나 관계에 약한 고리가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 감정 정리 단계에 들어가기 일쑤다. 미혼 남녀의 연애라면 애정의 흔들림이나 퇴색도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만, 불륜의 경우에는 잠시 희미해져 있던 도덕률이 명쾌하게 작동하면서 급속하게 정리 모드로 돌입하기 쉬운 것이다.
다행히 바로 그 시점에 상대방도 그러한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다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하강 국면으로 접어드는 변곡점이 시간적으로 일치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한쪽에서는 한참 상승 무드로 가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내리막길로 방향을 선회할 경우, 정리 당하는 이에게 몰아치는 감정의 파도는 매우 사납다. 안식처를 잃은 외로움과 허전함, 물불 가리지 않는 집착, 실컷 이용만 당하고 싸늘하게 버려졌다는 배산감, 끓어오르던 욕정만큼이나 힘차게 치밀어 오르는 복수심...
하지만 모든 에로스가 그렇게 불순한 것일까. 불륜이지만 ‘순수한’사랑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배우자가 있는데 거역할 수 없는 또 다른 사랑이 뒤늦게 운명처럼 다가오는 경우 말이다. 운명적 사랑 같은 것은 없다고 누구도 단언하지 못한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영화에서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 떠나지는 않더라도 일정한 단계에서 멈추어야 할 때도 있으리라. 나와 상대방의 인생에 무엇이 최상인가를 두루 살피고 냉정히 따지지 않으면 ‘순수한’사랑도 얼마든지 지옥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놓여 있는 삶의 조건까지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깊고 완벽한 사랑에 가까운 것이리라.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고,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런 불완전성과 모순을 뛰어 넘고 승화할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의 힘이다.
김찬호 / ‘생애의 발견’중에서(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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