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키워드 - 리듬과 강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결혼이란 “더욱 높은 신체를 창조하는, 창조하는 자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역시 핵심은 몸이다. 창조는 몸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삶을 창조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새로운 몸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새로운 신체를 창조할 것인가? 원리는 간단하다. 리듬과 강도(intensity). 우리 몸은 이미 어떤 종류의 리듬과 강도로 세팅되어 있다. 모임에 지각하는 사람은 늘 어디서나 지각을 한다. 용두사미형 인물은 어디서건 초반에는 방방 뜨다 중반부만 되면 슬그머니 사라지곤 한다. 나 같은 ‘소심한 무데뽀 형’은 처음에 쉽게 움직이지 않지만,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끝을 보고야 만다. 기타 등등. 이것이 바로 리듬이다. 리듬이 시간적 질서라면, 강도는 공간적 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즉, 같은 리듬을 가지고 있어도 그 리듬이 만들어 내는 ‘어팩션(affection)’은 다 다른 것이다. 요컨대, 리듬과 강도란 우리 몸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체질이라든가 팔자라는 것도 결국은 다 여기에 달려 있다. “우리 삶의 인과(因果)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몸 내외(內外)에 존재하고 있다.” 혹은 “내 팔자가 내 몸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농담)
강의 중에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전생이 궁금하십니까? 그러면 다들 눈이 동그래지면서 귀를 쫑긋한다. 답은?” 지금 살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전생입니다. “썰렁~하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답변은 없다. 알다시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별은 지금 별의 모습이 아니다. 몇 억 광년 전, 사람으로 치면 전생에 해당하는 아득한 과거의 그 빛과 모양을 우리가 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 저 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거나 아니면 폭발되어 우주의 허공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지금 현재를 그대로 연출하지 못한다. 과거의 어느 시공간적 흔적을 투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음 생의 모습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꼬라지“가 바로 우리의 미래다.
너무 절망적이라고? 아니다. 그 반대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의 현장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이 다 맞물려 있는 인생과 우주의 승부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과거의 그림자, 미래의 실루엣을 떨쳐 버릴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아 낼 수 있다. 그 척도는 어떤 리듬과 강도를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그리고 딱 그만큼이 나의 다음 스텝, 곧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인데, 이보다 더 기막힌 프로젝트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요컨대, 삶의 창조란 거창한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바로 이 ‘지금, 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의 리듬과 강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 리듬과 강도를 바꿀 수만 있다면, 인생 역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와우~
평소, 우리의 리듬과 강도는 엄청 산만하다. 한마디로 멍~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무명이다. 그 무명 속에서 ‘탐진치’가 자라난다. 뭔가 큰 촉발이 일어날 때라야 이 무명의 상태에서 깨어나는데. 주로 분노하거나 쾌락에 빠지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 쾌락과 분노는 다 몸에 해롭다. 따라서 마냥 멍한 상태로 살면 분노와 쾌락 사이를 오가느라 점점 더 리듬과 강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론 뭘 해도 열정과 끈기가 따라붙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이 멍하고 산만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리듬의 거품을 빼면 강도는 절로 확보된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 인생의 대가들은 이 점에서 아주 탁월하다. 매일매일의 일상은 물론이려니와 단 한순간, 아니, 단 하나의 호흡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몸과 마음, 말과 행위 사이에 완벽하게 상응을 이루게 된다. 이런 것을 일러 삶의 진정성이라 할 터. 사랑이란 그런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 해당한다.
사랑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태풍이 몰아쳐 나로 하여금 뭔가에 강렬하게 집중하도록 하는 일대 사건이다. 그때 일어나는 집중력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어서, 그 정도의 힘이라면 내 몸에 쌓인 낡은 흔적들을 일거에 몰아낼 수 있다. 만약, 그 정도가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예컨대, 사랑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몸과 일상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하고 있다면, 사랑을 꿈꾸고 있다면 먼저 동선을 바꾸라. 동선을 바꾼다는 건 “일상의 차서(次序)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차’란 시간적 순서, ‘서’란 공간적 질서다.”(농담) 차서를 재배치한다는 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순서를 바꾸고 하루의 활동들을 시공간적으로 다르게 안배한다는 뜻이다. 삶은 몸의 에너지들이 서로 교호하는 물리적 장이다. 내가 리듬과 강도를 바꾸면 당연히 내 주변에 이전과는 다른 물리적 장이 형성된다. 인연조건이 달라진다는 뜻. 그렇게 되면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와 활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신체의 창조며 삶의 창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대상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더 넓게는 이 세계와의 공존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 공존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삶의 창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이다.
“언제나 그 스스로가 농사 짓는 농부가 되라, 이 존재세계의 인(因)이 되어라. 주인이 되라.”
우리가 모두가 인(因)이 될 때, 이 인과 인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걸 인연(因緣)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인연, 이거는 인연이 성숙되지 않았거나 인연이 넘었다. 인연이 끝났다 그럽니다. 그래서 인연이 성숙되지 않은 중생은 부처도 구제하지 못한다 그러죠. 사무치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연(緣)이 되지 말고, 인(因)이 되라는 소리, 이게 바로 ‘닦는다’는 개념입니다.(농담, 「삶과 수행」)
고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혼자 갈 수 있는 자만이 누군가를 사무치게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니.
고미숙 / ‘호모 에로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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