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송담(松潭) 2008. 5. 2. 10:10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 실로 변하는 건 / 사람뿐이다. // 시간에 집을 지으라 / 생각에 집을 지으라 //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 실로 변하는 것은 / '오고 가는 것'들이다."〈의자 6〉


조병화(1921~2003) 시인의 시 〈의자 6〉을 읽고서 나는 망연히 물처럼 앉아 있다. 나의 바깥은 바람 가듯 물결 지듯 지나가는 것이 있다. 순간순간이 작별이다. 여관이 여관에 들었다 나가는 하룻밤 손님과 작별하듯이. 허공이 허공에 일었다 잦아드는 먼지와 작별하듯이.


그리고 〈오산 인터체인지〉를 다시 읽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보인다. 사랑이 갈라서는 것이 보인다. 맞잡았다 놓는 당신과 나의 손을 안개가 물컹물컹 잡아 쥔다. 안개를 두른 당신과 나의 행로에 대해 알 방도가 없다. 나는 동쪽으로 사십 리를 가지만, 당신은 남쪽으로 천 리를 가야 한다. 내가 가야 할 거리보다 당신이 가야 할 거리가 까마득하게 더 멀다. 당신이 나를 떠나 보내는 거리보다 내가 당신을 떠나 보내는 거리가 훨씬 멀다. "자, 그럼"이라는 대목은 또 어떤가. 가슴이 아프다. "자, 그럼"이라는 표현에는 뒤편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단호한 듯 순응하는 듯 "자, 그럼"이라고 말하지만, 그 음색에는 애써 숨긴 슬픔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 시에서처럼 조병화 시인은 단독자인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밀통하고 내통했다. 꾸밈이 없는 어투로 그는 생애 내내 우리네 도시인들의 슬픔을 노래했다. "사랑하는 사람아 / 너는 내 비밀을 아느냐 // 나는 아직 어려서 // 슬픔이 나의 빛/ 나의 구원 / 나의 능력"〈너는 나의 빛〉.

그는 '편운(片雲)'이라는 호를 썼다.


문태준 / 시인

(2008.5.2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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