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팜므파탈(femme fatale)

송담(松潭) 2007. 10. 8. 16:10
 

신정아는 과연 팜므파탈인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신정아 씨를 몇몇 사람들이 `한국의 팜므파탈`이라고 표현하는 걸 봤다.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격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라는 프랑스어는 `치명적 여인`이나 `운명적 여인`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보통 팜므파탈을 `악녀(惡女)` 정도 뜻으로 이해하는데 팜므파탈과 악녀는 결코 같은 뜻이 아니다.


팜므파탈이라는 말 속에는 많은 은유가 숨겨져 있다.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자기 삶을 비극적으로 끝낸 여인이 팜므파탈이다. 그래서 팜므파탈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의 좋은 소재로 활용되거나 하나의 전설로 남는다.


동양 여인으로 팜므파탈이라는 낙점을 받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전설적인 적군파 간부 시게노부 후시코다. 벤구리온공항 테러사건, 일본항공 납치사건, 쿠알라룸푸르 미국 영사관 점거사건 등 굵직한 테러사건 때마다 검은 긴머리를 휘날리며 외신에 등장했던 그녀는 70년대를 상징하는 팜므파탈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그녀를 미화하자는 게 아니라 그녀의 악행 이면에는 나름대로 치명적인 운명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전후 도쿄 달동네에서 태어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장공장에서 여사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첫 직장이 그녀에게 안겨 준 건 고졸 여사원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뿐이었다. 그녀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메이지대학 야간부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세상에 저항하는 투사가 된다. 일본 학생운동이 실패하자 그녀는 팔레스타인해방운동에 참가하게 되고 기관총과 폭탄만이 세상의 차별을 없앨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렇게 그녀는 세계적인 테러리스트 반열에 올랐다. 시게노부는 결국 2000년 11월 일본에 잠입하다 체포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다른 팜므파탈들도 모두 치명적인 운명에 내몰린 여인들이다.

마릴린 먼로도 팜므파탈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머리가 텅 빈 섹스 머신` 정도로 치부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그녀는 "할리우드는 키스 한 번에 1000달러를 지불하지만, 영혼은 50센트인 곳"이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의식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전 미국을 휩쓸 때 당당히 매카시즘에 저항한 배우였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급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지지했으며, 가부장적인 할리우드 시스템을 비판한 의식 있는 여배우였다. 하지만 남자들은 오로지 그녀의 몸에만 광분했고 결국 수많은 의혹을 남긴 채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만약 예쁘지 않았다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그녀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 주인공 에바 페론도 팜므파탈로 불린다. 보수주의자들이 악마라고 폄하한 그녀는 세상과 싸운 여인이었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타고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농장주 자식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 후 고향을 떠나 나이트클럽 댄서, 싸구려 코미디 배우 등을 전전하다 쿠데타 주역이었던 후안 페론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후안 페론이 집권하면서 영부인이 된다. 영부인이었던 시절 내내 반대파들에게 창녀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지만 그녀는 빈민구호에 앞장섰고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준 진보적 정치가였다.

적어도 이쯤 되는 여인들에게 호사가들은 팜므파탈이라는 호칭을 붙여준다.


다시 신정아 씨 이야기로 돌아가자. 몇몇 사람들이 그녀를 남성 중심의 학력사회에 도전한 팜므파탈로 묘사하는 건 옳지 않다. 아직 더 많은 조사가 이루어져야겠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유명대학 졸업증명서나 위조한 여인을 팜므파탈로 부른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위에서 거론한 여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정직했고, 결과가 옳았든 옳지 않았든 세상에 맞서 정면으로 승부를 했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고 해서, 미모를 지녔다고 해서 팜므파탈이라는 용어를 남발하는 건 아무래도 지나치다.


허연/ 문화부 차장

(2007.10.8 매일경제)

 

* 팜므 파탈(femme fatale)

팜므파탈은 불어로, 팜므(femme)는 여성을 뜻하며 

파탈(fatale)은 영어의 fatal과 같은 말로 사전적 의미로는 치명적이라는 뜻을 지니며, 그 어원은 그리스어 fata에서 나온 말로 죽음과 같이 피할 수 없는 운명 또는 숙명을 말한다.

따라서 ‘비운’같이 안 좋은 결말을 의미한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운명의 여인’ 또는 ‘위험한 여인’정도가 된다.

 

 


  에바 페론

 

 

에바 페론



뮤지컬 에비타의 주인공 에바 페론. 그가 아르헨티나의 성녀로 추앙받는 것은, 단지 미모의 대통령 부인이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나이 열다섯 때부터 생존을 위해 단역배우로 전전했던 밑바닥 삶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는 스물넷에 후안 페론을 만나 1952년 세른넷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억압받는 노동자·빈민·여성의 헌신적인 대변자였다.


2차대전 종전 이후 군사정권의 실력자였던 후안 페론이 미국의 압력으로 연금당하자 에바 페론은 목숨을 걸고 노조를 설득해 총파업을 끌어냈고, 그를 정치적 위기에서 구출했다. 후안 페론이 46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외국자본 추방, 기간산업 국유화 등 페론주의를 펼쳐나갈 때 에바는 노동자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외치며 전국을 누볐다. 타고난 미모와 소외 계층에 대한 헌신과 애정 덕분에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하지만 페론주의가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으로 흘러가면서 나라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외 계층 배려는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선심성 정책에 머물렀다. 또 에바의 이름을 딴 학교·병원·재단이 곳곳에 세워졌다. 빈약한 재정으로 이탈리아·프랑스 등 외국 재해민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권력기반이 흔들리면서 개인적인 불행이 찾아왔다.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후 후안 페론은 오래가지 못했다. 55년 군부 쿠데타로 페론주의는 종말을 맞았다.


현직 대통령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아르헨티나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뒤에 에바 페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화려한 외모와 사치스런 생활이 그렇고, 인플레 위험에도 불구하고 저소득층에 대한 현금 지원을 인기의 발판으로 삼는 점도 닮은꼴이다. 그 역시 에바 페론처럼 미모와 인기만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남기 논설위원(2007.11.1 한겨레)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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