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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내공’중에서

송담(松潭) 2024. 4. 8. 18:56

 

< 1 >

 

진도의 '나절로' 선생

 

 

사진출처 : 남도일보

 

 

나절로 선생은 진도 임회면의 여귀산(女貴山, 457m) 아래 산다. '산부재고유선즉명山不在高有仙則名”이라 했다. 산이 높다고 좋은 게 아니라 그 산에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라는 뜻이다. 여인의 유방처럼 유두도 달린 형상인 여귀산 자락에 사는 나 선생은 '한국의 소로Thoreau'다. 미국의 월든 호숫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던 소로는 45세에 죽었지만, 나 선생은 60대 중반에 여전히 건강하다는 점이 다르다. 소로는 오두막집에서 몇 년 살다가 도시로 나갔지만, 나절로는 평생 여귀산 아래의 연못을 떠나지 않고 우직하게 살고 있다.

 

나절로는 이름이 아닌 호다. 본명은 이상은이다. '내 방에는 시계가 없소. 내 방에는 거울이 없소. 내 방에는 달력이 없소. 시계가 없어 초조함을 모르오. 거울이 없어 늙어가는 줄 모르오. 달력이 없어 세월 가는 줄 모르오. 아~ 내사, 절로 절로 살고 싶소‘ 이 시를 19세 때 썼다. 당시 소설가 이병주가 우연히 이 시를 읽고 “정말 자네가 쓴 게 맞나? 아프로 자네 호는 '나절로'라고 하게"라고 해서 '나절로'가 되었다.

 

“다른 호는 없습니까?"

“대충'과 '시시'가 있어요."

"무슨 뜻이죠?"

“대충 살고 시시하게 살자는 의미입니다."

 

나절로의 고향은 진도 임회면이다. 20대 때 먹고살기 위해 도시에 나가 한 3년 살았지만 사는 게 감옥같이 느껴져 다시 고향 산천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도시에 나가지 않고 진도에서만 살았다. 40세 때 임회면의 폐교를 구입하여 여기에 연못을 파고, 상록수도 심고, 그림 전시하는 미술관으로도 사용한다. 여귀산 자락의 물이 관을 타고 집안의 연못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왠지 부자가 된 느낌이 든다.

 

"낚시광이었던 아버지가 진도군 목섬에서 낚시를 즐겼어요. 10대 시절 심부름 가면서 난대림과인 동백나무, 후박나무, 돈나무, 다정금, 생달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통과하곤 했어요. 5월에 꽃이 피면 그 녹색의 나뭇잎 냄새와 꽃향기가 코를 찌르고, 그 열매들을 따 먹으면서 자연이 주는 행복감을 맛보았던 것 같아요. 그 행복했던 기억이 저를 진도의 상록수 나무숲에서 살도록 한 것 같습니다.”

 

< 2 >

 

궁하면 통한다

 

 

돈이 풍족하면 생각을 덜 하게 되고, 궁색해야 난국을 타개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내공을 쌓는 방법은 두 길이다. 독서와 여행.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돌아다니면서 하는 독서이다. 여행은 쉽지 않다. 여행을 다니려면 돈, 시간, 건강, 취미라는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은 상팔자임이 분명하다. 역시 1번이 돈이다. 외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돈 들어가는 항목은 비행기표 값, 호텔비, 식비이다.

 

이걸 줄여서 나는 '비주식(飛住食)'이라고 부른다. 보통 사람은 이 '비주식'의 부담 때문에 여행을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지방의 조그만 대학 교수를 하다가 재단 이사장과 불협화음을 겪고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고 사표를 쓴 지인이 있다. 시간이 많이 나니까 정처 없이 세계를 떠돌았다. 떠돌면서 '비주식'의 달인이 되었다. 돈이 풍족하면 생각을 덜 하고 돈이 궁색해야 난국을 타개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 비행기표는 저가 항공을 이용한다.

 

검색을 하면 로마에 갔다 오는 왕복 티켓을 50만 원 정도로 구입하는 방법이 있다. 가격이 싸니까 직항은 불가능하다. 중간에 2~3군데 정도를 경유해야 한다. 한 군데서 9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수도 있으니까 미리 요가매트를 준비해서 공항 대합실 후미진 데다 깔아 놓고 잠을 자기도 한다. 장시간 기다리는 데에는 요가 매트가 유용하다.

 

주는 어떻게 하는가? 유스호스텔을 이용한다. 1만~2만 원이면 된다. 주로 20~30대 세대의 젊은이들이 많이 이용하니까 열린 공간에서 이들과 어울리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 볼 기회이기도 하다.

 

식은? 전기밥솥을 가지고 다닌다. 2인분 정도의 조그만 전기밥솥이 아주 유용하다. 유스호스텔은 간단히 취사할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장기간 외국 여행할 때는 김치와 깻잎, 멸치 조림, 된장국을 먹어야 피로가 덜하다. 만리타국의 밥솥에서 김이 나는 쌀밥에 깻잎을 얹어 식사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2~3군데 경유하는 저가 항공, 유스호스텔, 전기밥솥이면 '비주식' 경비를 확 줄인다. 아! 궁즉통(窮則通)이로구나!

 

 

< 3 >

 

용서는 하지만 잊지 않는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있는'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은 필자가 가장 가보고 싶은 산이다. 하지만 인연이 없어서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다. 높이는 1086m밖에 안 된다.산은 높다고 장땡이 아니다. 그런데 산 정상 부분이 평평하게 생겼다. 마치 테이블처럼 평평하다. 식탁같이 생겼다고 해서 혹자는 '식탁 산'이라고도 부른다. 산 정상의 평평한 부분의 길이가 무려 3.2km나 된다고 하니 굉장하다. 칼로 두부를 잘라 놓은 모습이기도 하다.

 

필자가 이 산을 주목하는 이유는 테이블처럼 평평한 그 모습 때문이다. 동양의 감여가(堪輿家, 풍수, 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산을 거문토성(巨門土星)의 형태로 분류한다. 아주 귀하게 여긴다. 제왕이 배출되는 기운을 지녔다고 본다. 왜 제왕인가? 제왕의 첫째 자질은 공평(公平)에 있다. 공평해야 만인을 다스린다. 공평함에서 카리스마가 나오는 것이다. 편파적이면 존경받지 못하고, 결국은 분란을 초래한다. 거문토성의 산은 정상 부위가 평평하므로 이 산을 평상시에 많이 보고 생활한 사람은 무의식에 공평한 마음을 축적하게 된다. 테이블처럼 생긴 모습은 마치 저울대의 양쪽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평평한 균형 상태의 모습과 같다.

 

그렇다면 케이프타운의 테이블 마운틴에서 과연 제왕이 나왔단 말인가? 넬슨 만델라(1918~2013)가 나왔다. 이제까지 아프리카 대륙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인물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가 아닌가.

 

만델라는 정치범으로 27년 감옥 생활을 했는데, 그중에서 18년 동안 로벤섬Robben Island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교도소에서 바라보면 눈앞으로 테이블 마운틴이 보인다고 한다. 눈만 뜨면 테이블 산이 보이는 셈이다. "며칠, 몇 주를 내다보면 비관스럽지만 몇십 년을 멀리 보면 희망적이다." 만델라의 말이다.

 

만델라는 교도소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거문토성의 공평무사한 정기를 받았다고 본다. 342년간의 백인 통치를 종식하고 처음으로 흑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가해자였던 백인들에게 보복하지 않았다. 공존의 정치를 하였다. '잊지는 않지만 용서한다(Forgive without forgetting)'가 그것이다. 나는 풍수를 신봉하는 감여가이므로 테이블처럼 평평한 거문토성의 산세에서 이런 철학이 나왔다고 여긴다.

 

 

 

< 4 >

 

달콤한 이야기를 조심하라

 

묵향을 맡으면 왠지 기분이 좋고 호흡이 아랫배로 깊게 내려가는 걸 느낀다. 먹물이 배어 있는 유가의 고택을 방문할 때도 그렇다. 편액이나 사랑채 벽에 걸려 있는 문구 내용들도 유심히 살펴본다. 그 내용들을 보게 되면 집주인의 취향이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안동 시내에 가끔 방문하는 치암고택(恥巖古宅)이 있다. 이 집 대청마루 벽에 칠언문구가 하나 쓰여 있다.

 

入朝當戒喜事 입조당계희사

持心貴在不欺 지심귀재불기

 

집주인에게 이 문구의 유래를 물으니 퇴계 선생이 젊은 율곡에게 당부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당대의 천재로 이름난 율곡이 23세 때 안동 도산의 퇴계 선생을 방문했다. 당시 퇴계는 58세였다. 패기의 젊은 천재와 홍시처럼 푹 익은 인품을 지녔던 대학자의 만남이었다.

 

퇴계는 많은 제자를 보아왔던 터라 젊은 사람들을 보면 지인지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2박 3일을 머물고 떠나가는 율곡이 퇴계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때 이 문구를 주었다. 朝當戒喜事 持心貴在不欺’ ‘조정에 들어가서는 희사(喜事)를 경계하고, 마음 닦는 공부를 할 때에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게 귀한 일이다'라는 뜻이었다.

 

전자는 벼슬길의 주의점이고, 후자는 내면 수양의 요점이었다. 여기에서 '회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통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율곡이 머리가 좋으니까 아이디어가 샘솟을 것이고, 아이디어가 많다 보면 틀림없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자'는 제안을 조정에서 많이 할 것으로 퇴계는 본 것이다. 너무 제안을 많이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 달리 보고 싶다. '회사'를 '달콤한 이야기'로 해석하고 싶다. '기쁜 일’이라는 것은 결국 임금이 듣기 좋은 일, 또는 듣기 좋은 이야기 아니겠는가. 대통령이 참석하는 청와대 회의에서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지 말라는 당부로 여겨진다. 임금이 듣기 좋은 달콤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고택에 써진 '입조당계희사’를 보고 느낀 소감이다.

 

 

< 5 >

 

이원성의 극복, 태극화풍

 

 

고독을 극복하려면 이원성을 극복해야만 한다. 나와 우주, 동양과 서양, 자연과 기계문명, 남과 여, 고향과 타향.

 

그 사람이 사는 집을 가 보면 그 사람 취향과 내면세계 또는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공간이 생각을 형성하기도 하고 반대로 생각이 공간을 창조하기도 한다.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에 있는 화가 이성자(1918~2009)의 작업 공간은 태극 형상이다. 반달 모양의 음과 양이 약간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붙어서 태극으로 복귀하려는 형상이다. '은하수'라는 이름이 붙은 이성자의 둥그런 태극 형태 아틀리에는 매우 이색적이다. 평지에서 보면 둥그런 집이지만, 공중에서 바라보면 동양사상의 태극도 모습이기 때문이다.

 

1951년도에 프랑스로 건너가 여기에서 처음 미술 공부를 시작하고 죽을 때까지 50여 년을 프랑스 주류 화단에서 활동한 이성자는 어떻게 태극과 음양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게 되었을까? 태극과 음양은 도사들의 아이콘이 아니던가!

 

내가 30년 넘게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인 사주, 풍수, 주역을 연구하면서 최종 귀의처로 여긴 도상이 바로 태극도다. 태극을 알아야 강호동양학이 완성된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다시 오행으로 분화되고, 오행이 만물을 형성한다는 우주관이 바로 태극도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처음 시작인 태극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다. 퇴계 선생의 공부 요체인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제일 첫째인 제1도圖에 나오는 그림도 바로 태극도다. 한국의 국기도 태극기다. 세계 어느 나라 국기보다도 심오하면서도 웅혼한 우주관을 표현한 국기가 태극기라고 생각한다.

 

이성자는 유년 시절에 아버지 손 잡고 김해 수로왕릉의 숭인문에 그려진 태극 문양을 보았는데, 이 태극이 죽을 때까지 무의식에서 떠나지 않고 그의 전 생애 화풍을 지배하였다. 반달 모양 음양이 태극으로 복귀하려고 하는 그의 태극 화풍은 모든 이원성을 융합하고 녹여내려는 그의 예술철학으로 여겨진다. 나와 우주, 동양과 서양, 자연과 기계문명, 남과 여, 고향과 타향이다.

 

30대 초반 나이에 아들 셋을 한국에 놔두고 단신으로 프랑스에 건너가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여인. 이 여인이 가졌던 비장한 고독을 극복하려면 이 모든 이원성을 극복하여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가 죽고 나서생각해보니 이성자의 태극 화풍은 한류의 시작이자 사상적 모태였다는 생각이 든다. 태극도를 서구적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건축한 '은하수'는 강호동양학자를 감동시켰다.

 

 

< 6 >

 

나의 부사의방은 어디인가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

 

 

수백 미터 높이의 바위 절벽 동굴에 고립되어 있을 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인정 욕구'를 초월할 수 있는가.

 

세상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돈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사고 싶은 물건도 더 많아지고 가 보고 싶은 외국도 더 많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돈과 물질로 에너지를 대신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돈에 대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인간성은 냉혹해지고 영혼은 차츰 쪼그라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범부중생(凡夫衆生)의 삶이란 말인가!

 

 

부탄의 탁상 사원

 

신문의 주말 매거진판에 보니 깎아지른 바위 절벽의 한 틈새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히말라야 부탄의 탁상 사원 사진이 실려 있다. 해발은 3120m이고 현장의 계곡 바닥에서부터 높이를 따지면 792m라고 한다. 천 길도 넘는 낭떠러지 바위 절벽 사이에 사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독수리나 호랑이가 살면 적당한 지형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바위 절벽 건축의 전형이다. 돈과 물질, 그리고 벼슬에 대한 갈망을 끊어줄 수 있는 건축이 바위 절벽 건축이기 때문에, 바위 절벽에 세워진 건축물들이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의 그 영험한 델피 신전도 석회암 산인 파르나소스산(2457m)의 700m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온통 바위 절벽투성이다. 그리스 정교의 메테오라 수도원도 수백 미터 솟은 바위 봉우리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지형이다. 무협지의 단골 무대인 중국 화산도 2000m가 넘는 화강암 산이다. 인수봉의 두세 배 되는 높이에 온통 바위 절벽이다. 중간중간 바위 절벽에는 전진교의 도사들이 수도했던 인공동굴들이 수십 개나 있다. 줄사다리 아니면 올라갈 수없는 곳이다.

 

변산의 의상봉 절벽 아래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면 암벽 중간에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터가 있다. 진표율사가 도 닦던 장소이다. 2~3평의 공간 밖으로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낭떠러지 절벽이다. 바위 절벽에서 나오는 펄펄 끓는 지기(地氣)의 도움을 받아야만 돈에 대한 집착을 끊을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수백 미터 높이의 바위 절벽 동굴에 고립되어 있을 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인정 욕구'를 초월할 수 있다. 암벽에서 고립된 생활을 해 보아야 독존의식(獨存意識, 혼자 있어도 외롭거나 두렵지 않은 정신)이 개발된다고 한다. 부탄의 탁상 사원에서 도 닦으면 과연 삶의 모든 집착을 끊을 수 있을까.

 

* 부사의(不思議)는 '보통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음'을 뜻하고, 방장(方丈)은 '고승들이 거처하는 처소'를 뜻한다. 부안 사람들은 '다래미 절터'라 하는데 다람쥐나 올라가서 살 수 있는 절이란 뜻이라고 한다. 의상봉 꼭대기에서 100여 척이 넘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절벽에 굴처럼 패인 4평의 넓이 안에 암자를 겨우 지어 쇠줄로 매달았다고 하며 그쇠줄을 매었던 쇠말뚝이 지금도 굴 벽에 박혀 있다.

 

 

<  7 >

 

한반도 명당

 

 

기도터는 웅장한 압도감이 있어야 한다. 화기와 수기가 서로 섞인 곳도 좋다. 이완에서도 기도발이 온다.

 

유럽에 가 보니 기도발을 받을 만한 영험(靈驗)한 터에는 거의 수도원이나 성당.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사는 것은 다 똑같아서 서양인들도 어디가 영지(靈地)인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영지는 거의 불교가 독점하고 있다. 불교는1700년 전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일찌감치 좋은 명당을 선점하였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위기 상황에 봉착한다. 이를 '산진수궁의무로(山盡水窮疑無路)'라고 표현한다. '산이 막히고 물길이 끊어져서 길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이때 기도처를 찾아야 한다.

 

내가 기도해 본 기도처를 꼽아 본다면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이 으뜸이다. 백담사에서 대여섯 시간 바위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도달하는 선경이다. 설악산 기운의 정수에 해당한다. 험준하고 일 년에 반이상 눈이 쌓여 있어 승려들과 심마니들이나 올 수 있었다. 그만큼 신성한 도량이었다. 우리나라 악산을 대표하는 설악산인 만큼, 그 바위와 암벽들이 주는 웅장한 압도감이 있다. 기도터는 웅장한 압도감이 있어야한다. 봉황의 정수리 터에 잡은 암자라고 해서 이름도 봉정이다. 봉정암은 바위가 쩔쩔 끓는 느낌을 준다. 그만큼 기도발을 주는 화강암 바위들이 물샐틈없이 둘러싸여 있다. 사흘만 제대로 기도하면 나름대로 효험이 있다. 필자는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 여기 가서 매달렸다.

 

경남 남해 보리암도 효험을 본 기도처이다. 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져서 봉정암과는 다른 기운이 나오는 곳이다. 봉정암이 화기가 충만한 곳이라면, 보리암은 화기와 수기가 서로 섞인 곳이다. 화기는 집중을 주고 수기는 이완을 준다. 내 경험에 의하면 보리암은 긴장을 이완시켜 주는 데서 오는 기도발이 작용하는 터이다. 집중에서도 기도발이 오지만 이완에서도 기도발이 온다. 보리암은 인생의 공허감을 달래주는 기도터이다.

 

청도 운문사 사리암도 영험하다. 이 터의 형국이 마치 압력밥솥처럼 생겼다. 기운을 푹 찐다. 여성 기도객들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은 묵은 영가(靈駕,영혼)를 물리치는 데 효과가 있다.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 장문인이 거처할 만한 풍광을 지녔다.

 

이밖의 기도처로는 동해안 양양 낙산사 홍련암, 서해안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남해안 여수 금오산 향일암이 있다.

 

 

< 8 >

 

월출산과 장보고

 

 

돌이 단단할수록 비례해서 그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도 강하기 마련이다. 내가 다녀 본 조선 팔도의 산 가운데 기억에 남는 강도의 돌은 계룡산, 금강산, 월출산이다. 영암군 월출산은 아주 단단한 암질이다. 바다도 가까운 위치이다. 바위의 불기운과 바다의 물기운이 서로 균형을 이룬 수화기제의 산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A급의 문필봉 여러 개가 포진되어 있다.

 

월출산 자락에서 왕인박사, 도선국사, 최지몽 태사가 배출되었으니 그 문필봉 기운을 증명한다. 그 유명한 월출산 서쪽의 문필봉인 주지봉의 영향이다. 동쪽의 사자봉도 선암마을에서 바라다보면 대단한 문필봉으로 보인다. 한 개도 아니고 손가락처럼 4개의 문필이 '따따블'로 포진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인물이 나오겠는데!' 마침 옆에 있던 향토사에 해박한 영암군의 천재철 실장에게 '이 근방에서 이름난 인물이 없느냐?'라고 물어 보았다. '이 앞의 들판 이름을 궁복이라고 부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100만평은 되어 보이는 넓은 들판이다. 궁복은 장보고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 동네 노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장보고가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장보고의 어머니가 기도했던 바위인 건덕바위도 동네 뒤쪽에 아직 있었고, 동네 옆의 동백정은 장보고가 군사를 훈련했던 터였다고 전해진다. 재미있는 지명은 동네의 국두암이었다. 동네 앞에 마당바위처럼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옛날에 배가 들어오면 배의 밧줄을 매어 놓던 바위였다는 것이다. 궁복(장보고)이 배를 타고 출발할 때도 이 국두암에서 출발한 셈이다.

 

'국가의 두령'이라는 뜻의 '국두'는 장보고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9세기 한·중·일 3국의 바다를 지배했던 해상왕 장보고를 이 동네 사람들은 '국두'로 여겼던 것이다. 국두암 이야기를 들으니까 월출산 구림마을 도선국사 생가터 마당에 솟아 있는 국사암이 생각났다. 월출산주지봉이 바라다보이는 쪽에서는 국사암이 있었고 사자봉 쪽에서는 국두암이 포진하고 있었다.

 

월출산은 고대부터 전라도 해상 물류 세력의 이정표였다. 해안가 평지에서 솟아오른 800m급의 바위산은 먼 바다에서도 육안으로 보였다. 특히 영산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나주 쪽을 들락거릴 때 월출산 뒤로 솟아오르는 보름달은 밤의 뱃길을 훤히 비춰주는 등대의 역할을 하였다. 월출산 이름은 해상 세력이 배 타고 지나가다가 붙인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장보고가 나왔다.

 

<  9  >

 

목소리는 멘탈이다

 

공부와 내공이 깊어지면 목소리가 달라진다. 맑아지면서도 탁음이 사라진 저음으로 바뀐다.

 

'관상불여음상(觀相不如音相)'이라는 말이 있다.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얼굴을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목소리는 오장육부의 공명(共鳴)이다. 오장육부의 어느 쪽 기관이 강하고 약한지에 따라 목소리가 달라지고, 성격과 기질이 달라진다. 목소리가 달라지면 건강에도 이상이 오는 경우가 많고, 건강에 이상이 오면 그 사람의 운세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도가에서는 사람을 품평할 때 목소리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공부와 내공이 진전되면 목소리가 달라진다. 맑아지면서도 탁음이 사라진 저음으로 바뀐다. 반대로 술, 담배를 많이 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하면 목소리가 탁해지고 갈라진다. 기름기가 다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수 패티김은 밖에서 저녁 약속을 안 한다고 들었는데, 이는 목소리로 먹고사는 가수의 생활신조는 맞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소리의 5단계를 중시하였다. 황, 태, 중,임, 남이다. 황은 가장 낮은 저음이고 남은 가장 높은 고음이다. 황은 오행 가운데 토±에 해당한다. 태는 금(金), 중은 목(木), 임은 화(火), 남은 수(水)에 해당한다. 목소리가 저음이면서 굵은 목소리는 황에 속한다. 보스 기질이 있는 목소리이다. 마피아 영화 <대부>에서 보스로 나오는 배우 말론 브랜도의 목소리가 황(土)이다. 쇳소리로 나즈막이 읊조린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불렸던 가수 레너드 코헨의 노래 <아임 유어 맨I'm your man>도 황의 음조이다. 깊고 묵직한 울림이 있다. 토는 중심과 포용력, 안정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태(金)에 해당하는 목소리였고, 김영삼은 중(木), 노무현은 임(火))이었다. 박정희는 종을 때리는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관상보다 목소리가 좋아 대통령이 되었다. YS는 목木의 인정이 느껴지는 목소리, 노무현은 화의 격발하는 기운을 담은 목소리였다. 안철수는 정치 입문 전에는 목소리가 '베이비 토크baby talk'에 가까웠다. 남(水) 음조의 소리로 컴퓨터 백신을 연구하다가 지난 5년 동안 정치판에 들어와 엎어지고 뒤통수 얻어맞고 코피 터지는 풍파를 겪으면서 목소리가 아래로 내려왔다고 여겨진다. 내공이 쌓였다는 말이다.

 

목소리는 멘탈을 나타낸다. 마음이 바뀌면 얼굴이 바뀌고 목소리도 달라진다.

 

 

<  10 >

 

학문과 문장가에 대한 존중

 

 

한 5년 전쯤인가. 대구 팔공산 자락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선비 집안을 방문하였다가 그 집 사랑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까 밥상머리에서 집주인이 한마디 했다. “해방 이후로 호남 사람이 저희 집에 와서 잠을 자고 가는 경우는 조선생님이 처음입니다." “해방 이후로 제가 처음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리지널 호남사람으로서 영남의 유서 깊은 선비 집안에 출입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20년 정도 지나니까 그 특징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말이 신중하다는 점이다. 흥분해서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말을 내뱉어서 약속하면 되도록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러므로 쉽게 약속하지 않고 신중하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수도 많지 않다. 되도록 상대방 말을 경청하는 습관이 붙었다. 이건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서부터 어른들한테 교육받은 탓이다. 유년 시절부터 가정 교육을 받은 내용이, 자기 자랑을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선비의 수신은 자기 자랑을 삼가는 데서 시작한다고 배웠다. 자기 자랑 많이 하는 사람은 수신이 안 된 것으로 간주했다.

 

자본주의 시대는 뭔가를 끊임없이 내다 파는 세상이고, 팔기 위해서는 물건이 되었건 자기 자신이 되었건 홍보를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피알(PR)과 유교적 수신은 이 지점에서 충돌한다.

 

퇴계 학풍이 스며들어 있는 안동 지역을 둘러보다 보면 무슨무슨 부사, 군수, 현감의 송덕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는 서 푼도 안되는 송덕비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또 한 특징은 접빈객(接賓客), 즉 손님 접대에 신경 쓴다는 점이다. 손님으로 가면 간소하나마 과일과 식혜, 육포, 보푸럼(대구를 말려서 방망이로 두들겨 잘게 부순 것), 한과가 들어간 다과상을 꼭 내놓는다. 안주인들 처지에서는 상당히 귀찮은 일임에도 다과상을 차려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안동의 학봉 종가는 업소용 대형 냉장고 3개, 보통 냉장고 10개, 3평정도 되는 저온창고까지 갖추고 있다. 접빈객과 집안 제사를 위한 음식보관용이다. 가장 결정적인 선비 집안의 특징은 학문과 문장가에 대한 존중이다. 돈과 벼슬보다도 학자에 대한 존중이 남아 있다. 윗대 선조들의 문집 번역과 간행을 위해서 문중 구성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내는 전통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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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

 

'강일독경(剛日讀經)유일독사(柔日讀史). 강한 날에는 경전을, 부드러운 날에는 역사책을 읽는다. 중국의 남회근이 쓴《주역계사 강의》(부키)에 나오는 말이다. 한가한 날에는 역사책을 읽어야 궁합이 맞는다. 역사책의 묘미는 바둑처럼 복기해 보는 데에 있다. 복기에서 교훈과 통찰 그리고 식견이 축적된다.

 

복기해 볼 만한 역사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사이다. 한국의 근·현세 100년 동안 영향을 미쳤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근래 재미있게 읽은 메이지 유신 관련 책이 《한국 사람 만들기2》(함재봉, 에이치(H)프레스),《조용한 혁명》(성희엽, 소명출판)이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의 1868년 4월의 담판이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 1828~1877)는 혁명군을 이끌고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성을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가쓰 가이슈(勝海舟,1823~1899)는 막부군의 편에서 에도성 방어를 책임지는 입장이었다. 당시 에도는 인구 120만 명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적대 관계였다. 서로 간에 처참한 살육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로 상대 진영에 대한 원한이 오래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살육을 하지 않고 타협을 했다. 무혈 항복이었다. 가쓰는 전쟁 없이 에도성을 사이고에게 넘겨주었고, 사이고는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비롯한 막부의 지도층들을 죽이지 않고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안전 보장을 해줬다. 나는 일본시를 읽을 때마다 이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다.

 

두 사람은 적대 진영에 속해 있었다. 1864년 사이고가 가쓰를 처음 만나 본 후 “가쓰는 학문에 있어서나 세상을 보는 눈에 있어서는 아무도 필적할 사람이 없다. 나는 가쓰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라고 하였다. 가쓰는 사이고에 대하여 "사이고를 만났을 때 나는 내 견해와 논리가 월등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사이고야말로 이 나라를 두 어깨에 짊어져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했다.

 

비록 진영을 달리했지만, 서로에게 이미 반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존경과 신뢰가 전쟁 없이 타협으로 끝낼 수 있는 요인이었다. 혁명 성공 후 사이고는 정부 요직에 가쓰를 추천하였다. 사이고가 반란군의 수괴로 죽은 뒤에도 가쓰는 그의 추모비를 세우고 가족들을 끝까지 챙겨주는 의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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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소나무에는 죽은 가지가 있다

 

 

인생은 '누구와 함께'가 중요하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색깔이 달라진다. 그래서 '복(福)중에 인연 복이 최고이다'라는 말도 있다. 소나무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어온 장고송선생을 만나다 보니까 소나무에 대한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 전국에 3백 년 이상된 노송이 약 2000그루쯤 있고, 이 중에서 자태가 아름다운 고송이 300그루쯤 된다. 300그루에서 다시 압축하면 신송이 나오는데, 이 신송은 전국에 20그루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한다.

 

"신송의 기준은 무엇인가?" "신과 같은 느낌을 주는 소나무를 가리킨다." "신과 같다니?" "나무를 보는 순간 경외감이 느껴지는 나무이다. 불굴의 기상을 풍긴다." "불굴의 기상이란 무엇인가?" “소나무가 살기 어려운 악조건에서 수백 년을 넘어 천년 가까이 살아온 나무에서 느껴진다. 대개 절벽의 바위 틈에서 자란다."

 

소나무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철학은 악조건이었다. 너무나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소나무들은 몸체가 뒤틀려 있다는 것이다. 토양이 별로 없고 바위 틈새에서 뿌리를 뻗고 살아야만 했으니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겠는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소나무 자신은 힘들었지만 이걸 바라다보는 인간에게는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 수많은 고비를 겪고도 아직 내가 죽지 않았구나' 하는 소회이다.

 

명품 소나무가 되려면 또 하나의 조건이 죽은 가지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가지가 너무 무성하면 강풍이 불 때 몸체가 자빠질 수 있다. 몸무게를 줄여야만 한다. 그러려면 가지가 몇 가닥은 시커멓게 죽어 있어야만 한다. 죽어 있는 가지가 사진작가에게는 여백의 미를 준다. 신송들은 시커멓게 죽은 가지들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시커먼 가지들은 송진 덩어리들이다. 바위 틈새에서 몸부림치며 성장하다 보니 나이테가 촘촘하다. 나이테 간격이 좁은 것이다. 동해안의 두타산 절벽에 이런 신송들이 여러 그루 있다고 한다. 두타산은 석회암 성분이 많다. 토양이 척박하고 험한 산에 명품이 있다.

 

장 선생에 의하면 한국 소나무가 세계 소나무 중에서 최고라고 한다. 로마의 가로수로 서 있는 소나무들도 기상은 있지만 한국처럼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갈라짐은 없다. 중국의 황산 소나무들도 명품이지만 한국처럼 꿈틀꿈틀하면서 용틀임하는 품격은 없다. 한국 적송에서 나오는 특유의 붉은색은 아주 귀족적인 색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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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값을 깎지 않는다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 필자는 15년 전쯤 간송 집안사람들을 집중 인터뷰하면서 내린 결론이 '문화재로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부자로는 호남에 인촌 김성수가 있었고, 영남에는 경주 최부자, 충청도에는 공주 갑부 김갑순이 있었다. 서울에는 간송 전형필이다.

 

당시 간송의 재산은 10만 석, 이 재산으로 조선의 미술품을 수집하였다. 간송은 죽어서 문화재를 남겼다. 간송 덕택에 한국에서 미술사라는 분야가 자리 잡을 수 있었고, 후학들이 미술품을 감상하는 안목이 배양될 수 있었다. 간송은 미술품을 수집할 때 특징이 값을 깎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값을 깎는다고 소문나면 골동상들이 일급 물건은 가지고오지 않는다.

 

1937년 도쿄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 30년 동안 거주했던 영국 존 개스비가 그동안 수집했던 고려청자들을 팔고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평소 개스비의 청자들을 주목하고 있던 간송은 황해도 땅 5000석을 팔아서 그 돈을 들고 도쿄로 날아갔다. 30대 초반의 새파란 젊은 사람이 자신의 청자 컬렉션을 전부 사겠다고 덤벼드니까 개스비는 '네가 감히 이걸 사겠다고. 돈은 가지고 있어?' 하는 심정으로 간송을 대하였다. 당시 쌀 1만 석에 해당하는 거금을 요구하였다. 간송은 그 자리에서 군더더기 없이 'OK' 내가 사겠다'고 결정하였다. 공주에 있던 땅 5000석을 추가로 팔아서 값을 지불하였던 것이다.

 

피카소부터 모네, 고갱, 르누와르에 이르기까지 세계 일류 작품들을수집한 이건희도 간송처럼 물건 값을 깎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선수는 깎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품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충분히 알아보는 '지물감이 있어야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안목, 이것이 쉽게 길러지지 않는다. 이건희는 자기 세계에 몰두하는 '덕후' 스타일이었지 않나 싶다. 이런 내성적 성향의 인간들이 사물을 골똘히 생각하고 거기에서 통찰력을 뽑아내게 된다. 후천적인 교육도 작용하였다. 아버지 이병철의 컬렉션을 보고 안목이 길러졌다. 명품을 많이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사용해 보아야만 안목이 깊어진다. 보는 것 외에도 촉감으로 느끼고 심지어는 그 작품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운도 감지할 수 있어야만 안목이 숙성된다.

 

간송이 일본 부자들과 경쟁을 하였다면 이건희는 루이비통 회장을 비롯한 세계의 부호들과 경쟁을 하였다. '이컬렉션'이 한국의 문화 산업을 일으키는 종잣돈이 될 것이다.

 

조용헌 / ‘내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