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어느 노인 죄수의 사실과 진실

송담(松潭) 2015. 8. 20. 17:34

 

어느 노인 죄수의 사실과 진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있었습니다. 집도 절도 없고, 편지도 접견도 없는 분입니다. 전과는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감방에서 대접도 못 받고 한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살고 있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자기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때가 있습니다. 신입자가 들어올 때입니다. 신입자가 입소 절차를 마치고 감방에 배치되어 들어오는 시간이 아마 이 시간쯤 됩니다. 대부분의 신입자들은 문지방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화장실 옆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대단히 긴장된 이 순간이 노인이 나서는 순간입니다. “어이 젊은이하고 부릅니다.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신입자는 그 소리가 매우 반갑습니다. 그러고는 노인다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형은 몇 년이나 받았고 만기는 언제냐는 등 정말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일루 와 봐하고는 노인 옆으로 불러 앉히고는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말이야로 시작되는 긴 인생사를 이야기합니다. 신입자가 들어오자마자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삼일 지나서 이 노인이 감방에서 별 끗발이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일정 때부터 시작되는 그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첫날 저녁에 바로 시작해야 꼼짝없이 끝까지 듣습니다. 그 노인과 3~4년을 함께 살고 있는 우리도 신입자가 들어올 때마다 그 이야기를 또 듣습니다. 그가 빠트린 것이 있으면 우리가 채워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노인의 이야기가 계속 각색된다는 사실입니다. 창피한 내용은 빼고, 무용담이나 미담은 부풀려 넣습니다. 1~2년 사이에 제법 근사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각색된 이야기에 도취되어 노인네가 구라푼다고 핀잔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과거가 참담한 사람이 자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늦가을이었습니다. 하염없이 철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 노인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노인의 야윈 뒷모습이 매우 슬펐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이 늘 얘기하던 자기의 그 일생을 지금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저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저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늘 이야기하던 일정 시대와 해방 전후의 험난한 역사가 그의 진실을 각색한 것이 사실로서의 그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진실이 사실보다 더 정직한 세계 인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영복 / ‘담론중에서

 

 * 위글 제목 어느 노인 죄수의 사실과 진실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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