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그늘

송담(松潭) 2015. 6. 9. 16:58

 

그늘

 

 

 큰누나가 시골집에 늙은 부모 둘만 사는 것이 보기에 적적했는지 기르던 강아지를 차에 싣고 왔다 몇 달을 어르고 달래도 눈이 오목한 강아지는 제 머리를 주지 않아 늙은 부모는 보송보송한 머리통 한번 쓰다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문간 옆에 쭈그리고 앉아 냉이를 다듬는데 가랑이 사이로 강아지가 쑥, 기어들어오더라 에그머니나, 어머니 가슴이 미어지더라 데려온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 하고 부르는 그 소리가 들렸다 한다 식구가 되기 위한 꼭 그만큼의 여물어진 시간과 눈짓, 오늘도 제 마음 다 준 강아지는 배를 걷어차여도 어머니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 고영민(1968~)

 

 

 

 

 

 “식구가 되기 위한 꼭 그만큼의 여물어진 시간과 눈짓이라는 구절에 자꾸 시선이 머문다. 새집에서 시간과 눈짓이 익을 때까지 강아지가 견뎌야 했을 두려움과 외로움의 그늘이 스며온다. 강아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저도 모르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무르익어 믿음으로 변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할머니가 아무리 걷어차도 할머니 가랑이 사이로 쑥 들어가고 싶어지는 행복한 순간을. 몸을 가지고 있는 한, 환경과 사회와 세상을 제 몸에 받아들이기까지 겪어야 하는 시간과 마음고생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낯선 사람이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기까지, 새 직장에 새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까지, 사람들 마음에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그늘이 지나갔으리라. 그 어두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덤덤한 척하기도 했으리라. 무심히 웃고 있는 지금도 내가 모르는 마음 하나는 몰래 홀로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어느날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외로운 존재라는 걸, 자신의 삶에 마음에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무서운 영역이 있다는 걸, 타인이 두려워도 혼자서는 못 산다는 걸,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은 목숨 걸고 사랑을 찾아다니게 되어 있다는 걸.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2015.6.8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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