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허태임 / ‘숲을 읽는 사람’중에서

송담(松潭) 2025. 7. 2. 12:57

 

 

 

< 1 >

 

숲속의 위험하고 무서운 것들

 

깊은 산속을 헤매는 날이 많다 보니 그만큼 위험에 노출될 일도 많다. 덩치가 큰 야생동물을 갑작스레 맞닥뜨리는 상상을 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멧돼지를 못 봤거나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하산하는 날은 오히려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새끼들을 데리고 나온 어미 멧돼지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타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모성애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반달가슴곰은 훨씬 더 위협적이다. 거대한 앞발에 얻어맞거나 뒷발에 밟히기라도 하면 정말 사람 인생 끝이다. 일단은 안 만나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곰이 출몰하는 구간이라고 해서 조사 지역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낯선 생명체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곰이든 사람이든 서로 깜짝 놀라서 평상심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멀리서부터 일부러 기척을 내는 것이 상황을 대비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곰이 들으라고 딸랑딸랑 울리는 종을 배낭에 걸고 걷는다. 동시에 주의를 집중해 다른 기척에 귀를 기울인다. 곰은 덩치만큼이나 숨소리도 커서 그르렁대는 소리가 먼발치에서도 들린다. 그걸 알아챘다면 탐사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각자도생줄행랑쳐야 한다. 이것이 야생에서 내가 익힌 곰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 금단의 땅에서 우리 팀은 곰의 기척을 듣고 물러났다가 잠잠해지면 나아가길 몇 번이고 반복했다. 봄에 조사를 시작해 여름이 다 돼서야 문수조릿대를 찾을 수 있었다.

 

덩치가 큰 포유류는 그나마 덜 무서운 편이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진드기는 산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 가운데 하나다.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드기에 물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죽는 건 아니지만, 그 진드기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균하고 있을 때는 생명을 들었다 놨다 할 수도 있다. 몸에 원래 없던 검붉은 점이 하나 생겼네, 하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점이 아니라 피부에 머리를 콕 처박은 채 피를 빨아 먹고 있는 진드기의 꽁무니다. 야생의 일에 워낙 익숙해져서 언젠가부터 내 피부에 박힌 진드기 뽑아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하는 편이다.

 

비무장지대의 산지 중에서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곳을 타깃으로 식물 탐사를 얼마간 이어나갈 때였다. 강원도 인제와 양구의 산들을 매일같이 다니던 9월 중순의 어느 날, 나는 어쩔 수 없이 진드기에 물렸고 여느 때처럼 잘 찾아서 빼냈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고열이 나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결국 대학병원에 실려 갔다.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금방 죽어요." 나를 진료하던 감염내과 전문의가 말했다.

 

털진드기는 쯔쯔가무시증을, 참진드기는 라임병을, 작은소참진드기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을 일으키는 매개충이다. 병원에 입원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내가 얻은 병이 쯔쯔가무시증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도 치료를 받으니 나의 증상은 호전되었다. 질병관리청의 감시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중대한 감염병으로 별도 관리하는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이 아니라고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여전히 심각했다.

“벌목 작업을 하던 분이 재작년에 환자분처럼 털진드기에 물려 쯔쯔가무시증에 걸렸어요. 다행히 금세 호전되어 건강하게 퇴원을 했습니다. 병원 나가실 때 그분 붙잡고 제가 그랬어요. 그 일 하지 마시라고요. 그런데 이듬해 다시 진드기에 물려서 구급차에 실려 오셨어요. 결국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판정을 받고 다음 날 사망하셨습니다."

의사는 치사율을 언급하며 진드기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현장에 나가 식물 조사하신다고 했죠?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그나마 젊으니 회복하신 겁니다. 저는 나이 드신 부모님 텃밭 농사도 못 짓게 해요. 제가 환자분 가족이라면 다른 직업 택하라고 하겠어요."

 

사실 의사가 염려한 것보다 더 다양한 위험이 내 일터 곳곳에 있다. DNA 분석 실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써야 하는 시료 중에는 무서운 발암물질이 든 것이 있다. 실험할 때마다 매번 어떤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자신의 불임이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흰자위를 붉히며 자책하던 선배는 결국 이 분야를 떠나고 말았다. 절벽에 붙어 사는 측백나무 개체수를 로프를 매고 조사하다가 추락사한 후배를 학계에서 모두 같은 마음으로 애도했던 때도 있다. 그 후배의 열정이 여전히 또렷하계 기억난다. 동물을 쫓으려고 쳐놓은 전기 울타리에 감전되어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 연구원의 소식을 들은 건 비교적 최근이다.

 

나와 식물분류학계 동료들이 일터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건 산에서 길을 잃고 혼자 맞게 되는 칠흑 같은 어둠일 것이다. 식물분류학 연구실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우는 안전 수칙은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의 대처법이다. 깊은 산에서는 최소 2인 1조로 움직여야 한다는 게 우리 학계의 불문율과도 같다. 하지만 보다 다양한 경로로 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한 팀이 찢어져서 일부 구간을 혼자 걷게 될 때가 있다.

 

불과 몇 해 전 소백산에 조사를 나간 모 대학의 식물분류학 연구원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그때 마침 불행히도 발목을 다쳐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휴대전화 배터리는 방전되어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도 없었다. 손전등마저 없는 상황에서 밤이 찾아왔다. 동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관할 구역에 실종 신고를 했고 소방인력이 대거 투입되어 밤새 구조 활동을 펼쳤으나 실종자를 찾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무사히 걸어 나올 거라고 울고 기도하면서 서로를 보듬었다. 오전 7시께 가까스로 한쪽 다리를 절며 제 발로 산을 빠져나오는 그가 포착되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발목을 다쳐 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의 말이 귀에 생생하다.

 

"밤이 돼서 연구실에서 배운 대로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식물 채집용 봉투를 온몸에 두른 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어요. 어둠이 너무 무서웠어요."

 

그 일이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학계 모임에서는 산에서 길을 잃고 마주하는 어둠이 얼마나 무서운지 저마다의 무용담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한 원로 선배께서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렇게 위험한 우리 분야에 나서기나 하겠느냐고, 식물 연구가 고위험 직업군이라고 자평했다. 그걸 듣던 누군가는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우리가 다루는 멸종위기종보다 식물분류학자가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 같다고.

 

나는 경남 합천의 가야산 중턱에서 길을 잃었다가 어둠을 헤치고 겨우 하산한 적이 있다. 식물분류학 연구실의 대학원생이 되겠다는 호방한 기상을 품고 있을 때였다. 지금처럼 탐사 준비물을 챙길 줄도 몰랐고 스마트폰을 쓰지도 않던 시절의 일이다. 숲속에서 어둠에 붙잡힌 나는 달과 별이 되쏘는 빛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길을 더듬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숲 아래로 한참을 걸었다. 도대체 얼마나 걷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을 때쯤 가까스로 산의 초입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제야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숲을 향해 내게 길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외쳤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매일매일 찾아오는 밤이 너희는 무섭지 않느냐고 나무에게 물었다. 어둠을 통과했기 때문에 해가 뜨는 거라고, 빛은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는 거라고, 그건지극히 자연적인 거라는 답변이 환청으로 들렸다. 그날의 일은 이후 내 앞에 찾아온 숱한 위험들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좋은 경험으로 작용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찾아올 때마다 나는 그 캄캄한 숲의 밤을 떠올린다.

 

< 2 >

 

 

올해 내가 담당한 과제는 크게 서식지에 대한 연구와 종에 대한 연구 두 가지다. 전자는 산 하나를 두고 그곳에 사는 식물의 종류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다. 산 정상을 기준으로 동서남북과 그 사이사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가보고 그 과정에서 만난 식물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일. 올해는 덕유산 근처에 있는 해발고도 1300미터의 산지 세 곳을 해빙이 시작되던 3월부터 10월까지 치열하게 조사했다. 대략 600여 종의 식물을 만날 수 있었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자면 “이 산에 이만큼 다양한 식물이 삽니다. 그중에 정원 소재로 좋은 식물과 약이 될 만한 식물과 산채로 유용한 식물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구간은 희귀식물의 집단 서식지로 확인되었으니 개발을 계획할 경우 별도의 보전 대책 마련이 필요합니다" 정도다. 후자는 특정 종을 타깃으로 표적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세계자연보전연맹에서 제안한 기준을 적용하여 국내에서 시급하게 보전해야 하는 종을 찾아내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기록하는 일. 그렇게 벌깨풀과 노랑팽나무와 문수조릿대를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그중 벌깨풀은 지구상의 남방한계지가 강원도 삼척이다. 이 북방계 식물은 북한에서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벌깨풀의 국내 자생지는 단 네 곳. 그중 한 곳이 관광지 개발로 인해 몽땅 훼손된 것을 이번 조사를 통해 목격했다. 이러한 결과를 정량화된 경제적 가치로 어떻게 환산해서 답해야 할까.

 

'수목원이 보전 연구도 하는구나. 식물만 잘 키우면 되는 거 아닌가?'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식물로 가득한 수목원에서는 생각보다 더 다양한 일이 복작거리며 진행된다. 300여 명 정도 되는 나의 동료들은 각자의 부서에서 저마다의 소임을 갖고 살뜰히 일한다. 수목원을 찾아온 관람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친절히 안내하는 일, 전보다 더 신박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일, 단단한 철학을 담아 다채로운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일, 세간의 이목을 끌 만한 식물 전시를 기획하는 일, 웹 기반의 관람 서비스를 통해 정보를 정확하게 제공하는 일, 맞춤형 반려 식물과 정원 소재 개발에 매진하는 일, 지역 농가에 도움이 될 사업을 이끄는 일, 식물의 원료에서 새로운 효능을 찾아내는 일, 경북봉화의 시드볼트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 호랑이숲을 가꾸어 백두대간의 상징과도 같은 호랑이를 정성껏 돌보는 일.......

 

이렇게 다양한 일들 사이에서 내가 하는 연구 분야가 돋보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목적도 방법도 각기 다른 수목원의 일들을 단순한 경제 논리를 가지고 서열을 따져야 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이 정부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것인지를 나는 잘 모르겠다.

 

2022년 여름, 첫 책이 나오고 예상치도 못한 관심과 인사를 참 많이 받았다. 그중에 수목원 동료들이 건넨 어떤 말들이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그간 지나치기만 했던 연구 부서의 일들을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네요. 고생 많으십니다" "책에서 말한 '초록 노동자'라는 표현이 제게도 참 와닿았습니다. 큰 위로가 되더군요" "우리 애가 책 보고 수목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네요. 고마워요"와 같은 온기를 품은 희망찬 말들.

 

그 따뜻한 격려에 힘입어 평가회 보고 준비를 더 야무지게 할 수 있었다. 혹여나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할지라도 나의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묵묵히 밀고 나가야겠다는, 그래서 식물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이초록의 일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게 담아서. 그러는 동안에 겨울이 내 앞에 바짝 다가왔다.

 

< 3 >

 

고요한 숲의 공명

 

악기가 되는 나무들이 있다. 그랜드피아노 한 대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들어간다. 향판은 울림이 좋은 가문비나무, 금속 현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부분은 너도밤나무, 다리는 튼튼한 참나무, 흰건반과 검은건반은 결이 부드러운 목재 중에 색을 고려해서 각각 피나무와 흑단나무를 쓰는 편이다.

 

세계적으로 30여 종의 가문비나무가 모여 가문비나무속이라는 가계를 이룬다. 모두 북반구가 터전이다. 가문비나무의 분포를 알면 어떤 나무가 그 지방의 악기가 됐는지를 헤아릴 수 있다. 이를테면 노르웨이,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독일가문비나무가, 북미에서는 시트카가문비나무가, 동아시아에서는 가문비나무가 현악기의 재료가 됐다.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소수민족 아이누족이 사는 쿠릴열도 둥지에서는 주변에 널리 자라는 가문비나무로 집도 짓고 배도 만들고 현악기인 톤코리도 만들었다.

 

한반도 이북에는 가문비나무가 왕성하게 퍼져 있지만 비교적 남쪽 지방에 해당하는 국내에서는 근근이 살아간다. 몇 해 전에 나는 백두산 중국령에 가문비나무 자생지를 조사하러 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진 군락지 풍경에 압도됐다. 독일가문비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노르웨이 숲에 온 것만 같은 착각도 들었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로 손꼽히는 트롤스티겐은 '요정의 길'이라는 뜻을 지닌 피오르안이다.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골짜기에 빙하가 없어진 뒤 바닷물이 들어와서 생긴 춥고 긴 만이다. 그곳에 거대한 독일가문비나무 숲이 찬란하게 펼쳐진다. 입학자 임경빈 교수는 독일가문비나무는 노르웨이에서 봐야 실감이 난다고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1961년 봄에 노르웨이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오로시는 독일가문비나무 숲속에 싸여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들인가? 독일가문비나무는 종교적인 침묵과 사색, 명상, 그리고 고요함을 담고 있다. 그러한 나무숲 안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우리나라에서도 독일가문비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 덕유산자연휴양림 골짜기에는 독일가문비나무 150여 그루가 모여 사는 울창한 숲이 있다. 1931년에 심은 묘목이 커서 지금의 고목이 됐다. 나무둥치 지름이 80센티미터가 넘고 높이는 30미터에 이른다. 덕유산자연휴양림 골짜기는 그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를 통과하며 국내 곳곳에 독일가문비나무를 조경수로 심었기 때문에 청와대와 경희궁 등 서울 시내에도 고목이 산다.

 

나무의 나이테는 진실하다. 자란 환경을 고스란히 비추기 때문이다. 봄철 온화한 때 나무는 빨리 큰다. 이때 생성된 세포는 막이 얇고 모양이 크다. 이 시기에 창조된 나이테 부분을 춘재라고 한다. 1년을 놓고 볼 때 먼저 형성됐다고 조재라고도 부른다. 색은 연하고 재질은 부드러우며 무르다. 반대로 생장이 더뎌지는 가을과 겨울에 만들어진 부분을 추재秋材 또는 만재라고 한다. 세포의 막이 굵고 모양이 작아 색이 짙게 보인다. 재질은 치밀하고 단단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곳에서 나무에 새겨진 춘재와 추재는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훨씬 선명하다. 춘재와 추재를 묶어서 하나의 연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무를 자른 면에 나타나는 그 둥근 테를 헤아리면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 가운데 '스트라디바리우가 있다. 그걸 만든 이탈리아 명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1644~1737)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악기 제조 기술은 첨단을 걷고 있으나 300여 년이 지나도록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뛰어넘는 바이올린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이 만든 제목과 천제의 기술이 딱 맞아떨어진 타이밍은 그 때뿐이었다고,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과거의 자연환경과 기후변화 등을 밝히는 연륜연대학자들은 1650년부터 1710년 사이 태양활동이 감소했다고 본다. 북반구 대부분 지역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그 시기를 '소빙하기'라고 한다. 고산의 빙하가 계곡을 타고 농지까지 확장됐다. 영국 템스강과 네덜란드의 운하가 얼어붙었다. 이상기온으로 유럽 전역에 가뭄이 이어졌고 가뭄 끝에 갑자기 내린 폭우는 마을과 논밭을 덮쳤다. 우리나라는 조선 현종 재위 기간인 1670년(경술년) 무렵 조선 팔도가 빠짐없이 흉작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경신대기근'으로 기록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일찍이 학자들은 그 시기 알프스산맥 수목한계선에서 자란 가문비나무를 천재 제작자 스트라디바리가 알아보고 고르고 골라 명품 현악기를 만들었노라고 밝혔다. 소빙하기에 고지대의 혹독한 환경에서 느리게 자란 독일가문비나무는 나이테 간격이 빽빽하고 나뭇결의 밀도는 높아 공명에 적합한 음향목이 됐던 것이다. 지구 평균기온은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꾸준히 상승했다. 별난 기술이 나올지라도 소빙하기에 자란 목질의 나무는 나올 수 없게 돼버렸다.

 

스트라디바리의 손에서 명품 악기가 탄생하던 그 무렵 바흐는 현악기를 위한 샤콘을 썼다. 가문비나무의 공명을 느끼기에 몹시 적확한 그 곡은 슬픔과 분노와 자멸과 포기와 망각과 때로는 온유와 평화와 같은 감정을 교차로 불러일으키며 내게 전율을 일으킨다. 특히 10여 년 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명동성당 대성전 중간 통로에 홀로 우뚝 서서 했던 연주는 언제 들어도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가문비나무가 다 같이 모여 부르는 추모곡 같다. 아니, 가문비나무가 저승에서 쓸쓸히 추는 군무 같다. 장인의 손에서 악기로 다시 태어난 나무가 그의 결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연주자를 만났을 때 온몸으로 부르짖는 그 공명!

 

공명은 물리학에서 외력에 의한 진동을 의미한다. 무지막지한 힘의 작용이 아니라 박자에 맞춘 반응을 뜻한다. 바이올린 활로 현을 긁어 진동을 일으키면 그 소리가 공명통에 닿아 더 큰 울림으로 퍼져나가는 현상. 그렇다면 누군가의 사상이나 행동에 공감해 따르는 것 또한 공명 아닐까. 어떤 사람의 자비로운 마음이 파장을 일으켜 주변을 온통 자비로운 기운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업이며 깊은 울림일 것이라고, 자꾸만 더 짙어지는 유월의 가문비나무 숲은 내게 공명한다.

 

< 4 >

 

실력이 정말로 형편없는 수준이란 걸 제대로 확인한 건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받은 체력장 테스트에서다. 체육 선생님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끈이 길게 달린 초시계를 누르며 100미터를 몇 초에 뛸 수 있는지를 평가했는데 내가 종점에 도착하는 순간 아주 큰 소리로 외쳤다. "19초!" 그건 학년 전체에서 꼴찌를 앞다투는 기록이었다. 철봉에 매달리고 윗몸을 일으키고 포환을 던지는 다른 종목에서도 나는 맨 끝을 면하지 못했다. “쟤는 운동 정말 못하나 봐." 친구들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았고, “몸이 허약하니 그럴 수밖에… "하는 체육 선생님의 총평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나의 약점이 탄로난 것 같아 스스로 더 무섭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마지막 종목은 달랐다. 학년 전체가 동시에 겨루는 장거리 달리기에서 결승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앞선 종목의 선두 주자들이 아니라 꼴등 쪽에 있던 나였다. 대열 맨 뒤에서 달리던 내가 중반 이후부터 앞으로 치고 나가더니 운동장 열 바퀴를 다 돌 무렵에는 맨 앞쪽 무리에 합류한 게 아닌가. 그 순간은 지금 떠올려봐도꽤 유쾌해지는 장면이다. 체격이 왜소한 애들은 운동 실력도 부족하다는 낙인을 떼버리는 순간이었으니까. 빨리 달리지 못하면 오래 달리지도 못할 거라는 편견을 뿅 사라지게 만드는 반전의 레이스!

 

건강한 다리를 타고났다기보다는 내 약점을 보완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발목이 굵어진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구력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날 이후 나는 전에 없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도 운동을 할 줄 아는 아이구나, 하고, 등산에 빠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내가 자란 시골 마을은 가야산국립공원 안에 있다. 내게 가야산은 국립공원이라기보다는 우리 집 뒤에 위치한 산, 말 그대로 동네 뒷산이다. 그 산에 수없이 올랐다. 여느 십대처럼 이유 없이 와다닥 웃음이 쏟아지는 날이 있었다. 느닷없이 눈물이 터지는 날도 있었다. 부모든 친구든 그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등을 돌리고 싶은 날도, 가만히 지나가는 고양이와 강아지에게조차 까닭 모를 배신감이 드는 날도 있었다. 감정이 소용돌이치던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다른 더 가지 않고 산으로 갔다. 나를 반겨주는 산이 가장 가까이 있었으므로, 국립공원 직원들이 매달았을 나무의 이름표와 나무를 맞춰보는게 좋았다. 노각나무, 까치박달, 매발톱나무, 대팻집나무, 빗살나무....... 한 그루 한 그루 특별한 이름을 불러보는게 참 좋았다. 그러면 더 기쁘기도 덜 슬프기도 했고 응원의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정상에 다소곳이 모여 사는 회귀식물들은 나를 1433미터 높이의 칠불봉까지 오르도록 이끌었다. 안간힘을 써 그곳에 닿아야 가까스로 만날 수 있는 구름병아리난초와 설앵초와 여우꼬리풀, 그 친구들이 자꾸 생각나서 나는 산을 올랐고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나의 안팎에서 오랫동안 버티며 견디는 힘이 늘어났다.

 

< 5 >

 

세상의 모든 것을 담는 시드볼트

 

 

내가 일하는 수목원에는 시드볼트가 있다. 노르웨이의 스발바르제도에 있는 시드볼트와 함께 지구상에 단 둘뿐인 시드볼트 중 한 곳이다. 시드볼트는 씨앗seed을 보관하는 금고vault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나 '미래 인류를 위한 씨앗 저장고'로도 불린다. 기후변화나 전쟁 등 지구 차원의 대재난에 대비해 식물의 멸종을 막고자 마련된 시설이다.

 

수목원에 방문하더라도 안타깝지만 시드볼트에 직접 들어가볼 수는 없다.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국가보안 시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수목원 방문자센터에서 실물과 같은 모양으로 작게 만든 시드볼트 모형을 볼 수 있고 시드볼트 내부를 구현해 놓은 장소에서 체험도 할 수 있다.

 

내가 근무하는 연구동은 수목원 방문자센터에서 약 4킬로미터 떨어진 해발고도 600미터 산속에 있다. 연구동에 마주 선 외딴 건물이 시드볼트다. SF영화에 나올 법한 외향으로 희한하게 생겼다. 보안 시설이니 대한민국 정부 방침에 따라 시드볼트는 GPS에 안 잡힌다. 자체 카메라와 통신망으로 영상을 수집해서 고국으로 되쏘는 테슬라 차량은 그래서 시드볼트 근처 출입을 엄격히 금한다. 연구동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주차해놓고 걸어서 출근해야 하는 테슬라 차주 동료들의 불만이 어지간하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는 tvN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소개되며 일반인에게 꽤 알려졌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진행하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드볼트를 알린 동료는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다. 언니는 광릉숲에 있는 국립수목원 시드뱅크에서 수년간 종자연구를 담당하다가 시드볼트와 시드뱅크가 둘 다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일하겠다고 몇 해 전 경북 봉화로 귀촌했다. 초등학생 남매와 갓 태어난 셋째에 남편까지 다 데리고서. 한때 폐교가 될 위기에 놓였던 전교생이 10여 명 정도 되는 수목원 앞 서벽초등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 중 언니 애들이 셋이다.

 

프로그램에 나가서 언니는 말했다. "시드볼트는 종말의 순간에야 비로소 열립니다. 지구에서 사라질 위험에 놓인 종의 씨앗을 가장 절박한 때 그 금고에서 꺼내 싹을 틔우지요. 종자를 저장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지만 엄밀히 다른 시설인 시드뱅크도 수목원에 있습니다. 시드뱅크는 시드볼트와 달리 씨앗을 그때그때 꺼내거나 넣을 수 있습니다.” 언니는 연구나 증식을 목적으로 운영 중인 시드뱅크가 국내외에 다 합쳐 1700여 개 정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드볼트는 강해야 한다. 백두대간 시드볼트는 고강도 지진이나 핵 폭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지하 46미터 아래, 다중 철판 구조의 터널 안에 거대한 냉동고가 있다. 영하 20도, 습도 40퍼센트를 언제나 유지한다. 이 숫자는 씨앗의 신진대사를 늦춰 발아를 정지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일반 전기와 추가적인 태양열, 지열뿐만 아니라 자가발전장치까지 갖추고 있어서 유사시 대체 전력이 공급된다.

 

보안상 출입이 허락된 이들은 지하 8층 정도 되는 땅속 깊은 그 비밀 곳간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지하에 도착하면 동굴 같은 콘크리트 터널의 냉동 금고 입구가 나온다. 내부에 입장할 때는 모자가 달린 검정 롱패딩을 입는다.

 

노르웨이에 있는 스발바르 시드볼트와 대한민국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한 시드볼트는 차이가 있다.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식량난 대비를 위한 식용 작물 씨앗을 저장한다. 백두대간 시드볼트는 우리 행성에서 인류가 농사짓기 전부터 있던 야생식물의 씨앗을 저장한다. 시드볼트에 들어갈 씨앗을 결정하는 일은 내가 속한 연구부서에서 한다.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 종자, 훼손된 땅과 산불로 잿더미가 된 숲을 복원할 때 쓸 종자 등을 시급성을 따져가며 정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식량이 되는 씨앗을 외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식량자원뿐만 아니라 식량자원의 원종까지 찾아내서 지키려고 애면글면한다.

 

인류가 사랑하는 식량, 콩,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콩의 기원이 되는 야생식물을 학자들은 '돌콩Glycine max subsp. soja'이라고 본다. 콩의 원종인 돌콩이 산과 들에서 저절로 자라고 있어도 우리는 잘 모른다. 수입 콩에 의존하는 게 익숙하고 편해서 관심을 안 두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작물인 콩 자급률은 7퍼센트에도 못 미친다고 들었다.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셈이다. 대한민국이 콩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모순되게도 미국은 한반도에서 자라는 재래종 콩 6000여 점을 20세기 초반부터 수집해 가서 품종으로 개발해 세계 각국에 수출하고 있다. 미국이 얻는 경제적인 이익은 엄청나다.

 

2024년 여름부터 얼마간 특별한 전시가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방문자센터에서 열렸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 후 작품으로 구현한 거였다. 관람객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 수목원 시드볼트 연구자와 전국 각지에서 토종씨앗을 수호하려 애쓰는 이들, 수목원이 위치한 경북 봉화 오지 마을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 대한 오마주였던 이 특별전 제목은 '사명'이다. 이들의 사명은 인류에게 종말이 오고 난 뒤에도 지구에 생명을 되살리려는 어떤 안간힘인지도 모르겠다.

 

< 6 >

 

이 동네 분위기가 나는 썩 마음에 든다. 더 먼 곳으로의 인사이동이 없는 한 거처를 옮길 생각이 당분간 없다. 여기 살아서 누리게 되는 나만의 호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극진한 돌봄을 받는 수목원 안의 여러 정원과 식물들을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며 즐길 수 있다-수목원의 전시 공간을 책임지는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전하며. 둘째, 계절의 경계에서 발견되는 자연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미세하게 변하는 온도와 습도에 소스라치게 반응하는 식물의 동태를 기록하느라 분주한 채로. 무엇보다도, 사방을 에워싼 백두대간의 산계가 위로부터 아래로 색을 바꾸는 늦여름의 광경을 시시각각 '직관'할 수 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도, 내 방에 누워서도 창밖으로 그 아름다운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볼 수 있다.

 

여름이 저물어갈수록 날씨는 청명해진다. 가을이 완전히 도착하기 전까지의 유독 짧은 그 얼마 동안의 시간은 내게 있어 1년 중 다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하다. 수목원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벌써 동면에 들 준비로 수선스러운 나무와 숙근초를 유심히 보게 된다. 생강나무는 잎이 노르스름해지기 시작한다. 이파리가 연둣빛을 상실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잎으로 향하는 양분을 차단하겠다는 나무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나무는 자신의 에너지를 열매 여물게 하고 겨울눈 만드는 데 쓰겠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나무는 가을이 오기 전에 빨갛고 봉긋한 겨울눈까지 미리 만들어놓는다. 한 나무에서 잎과 열매와 겨울눈이 동시에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순간은 늦여름에만 있다. 생강나무 아래서 애기나리와 둥굴레 군락은 잎이 다 누렇게 시들었다. 이때 뿌리는 땅속에서 내년 봄이 오면 틔울 새 촉을 하나둘 더 늘리고 있을 것이다. 땅을 파보지 않아도 땅 위의 잎이 노랗게 물드는 걸 보면서 식물의 변화를 안다.

 

이번 여름은 특히 거칠었다. 보기 드물게 길었던 무더위와 세차게 퍼붓던 폭우도 지금은 덧없이 사그라들고 있다. 기후가 미쳐가고 있다는 두려운 추측을 여름이 끝나가는 이 찰나에는 잊게 되는 것도 같다.

 

많은 걱정거리조차 반짝하고 망각하게 되는 경험을 나는 어두운 밤 산속 수목원을 걸으며 하게 된다. 늦반딧불이를 만날 때다. 여름이 기울면 수목원을 관통하는 운곡천 주변에 늦반딧불이가 출몰한다. 늦반딧불이는 얼마간 잔별처럼 빛을 내며 날아다닌다. 그들이 자취를 감추면 가을은 문득 서늘하게 이마에 도착하리라.

 

가을이 오고 있음을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남들보다 일찍 체감한다. 낙원으로 가는 문을 먼저 연 듯한 기분이 들어 때로는 충만감에 휩싸인다. 8월 말은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일 수도 있겠다는, 계절과 계절 사이에 삽입된 신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