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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담(松潭) 2008. 2. 26. 05:24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 버트런드 러셀 -



 종교를 비난하는 일은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다. 사회의 주된 통념으로 굳어진 신앙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교리 자체는 유익하고 훌륭하다. 하지만 지금의 종교인들의 모습은...... ”하는 식의 문장은 종교를 비평하는 글의 보편 문법이다시피 하다.

 그러나 러셀의 종교 비판에는 우회로가 없다. 논리와 과학으로 중무장한 노련한 철학자는 종교에 대해 곧바로 칼을 겨눈다. 그에게 종교는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준 근원’이며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인류 앞을 가로막는 괴물’일 뿐이다. 20세기 지성을 대표하는 러셀은 왜 이토록 종교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을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이러한 물음에 답을 주는 책이다.


종교는 갈등과 대립을 부른다

 

 러셀은 책 머리말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바라는 세계는 집단적 적대감에서 해방된 세계, 만인의 행복은 투쟁이 아니라 협력에서 나올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세계다.” 하지만 종교는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장애만 될 뿐이다. 합리적인 지식은 반박과 토론을 통해서 여물어간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는 반론도 논쟁도 무의미하다. 신심 깊은 사람들은 아무리 결정적인 반증을 제세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에게 신앙에 대한 ‘똥고집’은 오히려 깊은 믿음의 증거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세상에는 유일신을 내세우는 숱한 종교들이 있다. 그네들 교리대로라면 수많은 종교 중 하나만 참이고 나머지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항상 갈등과 대립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역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는 잔인함과 폭력이 넘쳐났던 때였다. 이른바 ‘신앙의 시대’라는 서양 중세에는 신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온갖 박해가 행해지지 않았는가?


성도덕 집착, 가치판단 왜곡


 러셀은 특히 성도덕 측면에서 기독교에 강한 분노를 터뜨린다. 그는 처녀 교사들을 예로 든다. 처녀 교사들에게는 정절 의무가 무척이나 중시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볼 때, 과연 성적 욕구를 억눌러야 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본능을 해소할 수 있는 사람보다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성적 욕구는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성적 욕구를 죄악으로 만들어버리고 정상적인 분출을 좌절시켜 버린다. 그 결과 기독교 도덕은 사람들을 모두 욕망에 억눌린 히스테리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성도덕에 대한 집착은 가치판단을 왜곡하곤 한다. 만약 일생을 열병 퇴치에 애쓰다가 몇 명의 여인과 ‘부적절한 ’ 관계를 맺는 사람과, 평생을 무능한 생활로 가족들을 고생시켰지만 성적으로는 결백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기독교의 잣대에서 볼 때 누가 더 도덕적인 사람으로 평가받겠는가? 러셀은 말한다. “성직자들은 해(害)가 되지 않는 행위는 비난하고, 커다란 해(害)가 되는 행위는 눈감아준다.”


과학이란 이름의 새로운 종교


 그렇다면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대안으로 러셀이 내세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죄와 벌이라는 낡고 험악한 교리 대신에 과학이 뒷받침된 윤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러셀이 말하는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취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여기서 지식이란 과학을 말한다. 과거 사제들은 페스트에 걸린 마을을 치유한답시고 대규모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모아놓은 예배는 질병이 더 빨리 퍼져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제대로 된 지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과학은 올바른 행동을 일러줄 수 있는 최선의 잣대다. 사람들은 이제 죄악을 “악마의 작용이 아니라 정상적이지 않는 호르몬 분비와 현명치 못한 여건 탓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모든 악의 원인이 되는 빈곤과 생존의 공포로부터 해방해줄 터다.


종교도 과학도 대안이 되지 못한 한계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 과학은 러셀의 확신과 달리 인류를 그다지 확실하게 구원하지 못했다. 과학기술은 인류를 빈곤에서 해방하는 만큼이나 더 큰 욕망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인류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욕구로 고통 받고 있다. 그뿐 아니다. 환경오염과 배가되는 전쟁의 공포 등 과학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제들은 종교적 광신만큼이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과학은 러셀의 생각처럼 종교의 대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 하나의 종교였을 뿐이다. 과학은 효율과 합리성의 이름 아래 다양한 가치의 잣대들을 잠재워버린다. 나아가 과학으로 무장한 광포한 자본주의는 세계의 문명을 자본의 기준으로 획일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세상은 온전하게 설 수 없다. 사실 러셀이 비판했던 광신적 기독교의 세계는 과학이 빚어낸 광신적 자본의 세계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함께 구원하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종교분쟁이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폭발음을 내고 있는 21세기 초엽, 이 작은 책은 새로운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안광복 / 중동교 철학교사

‘고전의 향연’(한겨레 출판)중에서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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